개인의 쓸모와 사랑
최근에 내가 푹 빠진 드라마 캐릭터가 있다. 베아트리스. 애칭은 비(Bea). 그녀는 수녀지만 사실 교황청의 비밀 결사인 십자가 결사단 소속으로, 긴 봉을 절도 있게 휘두르며 악마와 싸우는 뛰어난 전사다. 십자가 결사단은 언젠가 신이 인간 세상에 전해줬다는 ‘헤일로’라는 초월적 힘의 도구를 지키기 위해, 헤일로 보유자인 ‘워리어 넌’과 헤일로를 수호한다.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 시즌 1에서 비는 베테랑 수녀로서 평범한 인간에서 하루아침에 헤일로 보유자가 된 에이바(Ava)의 성장을 돕는 인물로 나온다. 주인공 에이바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인해 엄마를 잃고 그 자신도 사지가 마비된 채 종교 시설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버려졌다. 사고로 죽은 에이바의 몸에 우연히 헤일로가 이식되고 에이바는 영면을 거슬러 초인으로 되살아난다. 침대 붙박이였던 사지마비 환자에서 초인이 돼 속세의 자유를 즐기고 싶은 에이바를 다독여주며 신이 준 사명을 수행하게끔 돕는 수녀가 바로 베아트리스다.
베아트리스와 에이바의 관계는 흥미롭다. 한 명은 완벽주의자에 실수라곤 1도 없으며 심지어 적을 무찌르는 공격 하나하나에 절도가 넘친다. 다른 한 명은 통제 불가능한 똥강아지마냥 천진난만해 모두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통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대척점에 있는 그 둘이 스승과 제자로 시작해, 친구로서, 그리고 이뤄질 수 없는 연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시즌 2에서 그려지며 시즌 2는 화제성을 불러일으키고 이전보다 더 많은 팬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넷플릭스는 시즌3을 캔슬시켜 해외 온라인상에선 넷플 불매 운동이 일었다.)
비와 에이바의 관계성이 많은 팬들에게 가슴 절절하게 전해졌던 데는 그 둘이 가진 개인적 고통과 불안이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에이바트리스(Avatric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커플은 해외 LGBT 팬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 시작은 시즌 1에서 비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에이바에게 고백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내 평생 사람들은 나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려고 했어. ’ 정상‘으로. 안 되면… ‘그럴듯하게’라도.
내 이런저런 기술들 때문에 난 그나마 쓸모가 있는 거야. 나한테는 결함이 있거든. 적어도 난 결함이라고 배웠어.
당연히 나도 맞추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그저 다르단 이유로 벌을 받으면 내 존재를 혐오하게 돼.
내가 사랑하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그런 건 다 고통만 안기니까. 난 그 고통 때문에 수녀 전사가 된 거야.
- <워리어 넌> 시즌1 8화
헤일로가 가진 파워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워리어넌의 개인적 고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비는 에이바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고통을 들려준다. 그간 에이바가 라틴어에 불어까지 하고 ’사진같은 기억력‘을 가진 수녀라고 놀렸던 베아트리스는 사실 정치계에 있는 부모를 둔 금수저였다. 그러나 그녀가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에 수녀가 돼야 했다. 제 존재를 가족에게 외면당한 비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익히고 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뛰어난 수녀 전사가 되었다.
진솔한 비의 고백 덕분에 에이바도 제 개인적 고통을 자각하고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에이바가 갖고 있던 불안은 바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사지가 마비돼 다시 병원에 버려지고 제 곁에 아무도 없어지는 것. 그런 에이바에게 비는 에이바가 어떤 모습이든 동료들과 내가 함께 있어줄 거라며 다독인다. 비의 위로에 에이바도 마음의 문을 열고 워리어 넌으로서의 사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에이바트리스 관계가 흥미로운 데는 시즌 1에서 대척점에 있던 두 사람이, 서로의 고통과 불안을 알고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윽고 시즌 2에선 캐릭터가 교차하며 뒤바뀐다는 점에 있다.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베아트리스는 에이바 한 명을 지키기 위해 결사대의 의무를 저버리려 하고, 반대로 자신의 안녕만 좇으며 워리어 넌의 의무를 외면하던 에이바는 베아트리스 한 명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피해왔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음을 자각한 연인들의 담백한 고백과 이별이 시즌 2 마지막 화에서 함께 풀린 점이 많은 팬들에게 시즌 3을 부르짖게 했다. 시즌 2를 순식간에 다 보고 다시 시즌 1을 돌려보면서, 제작자가 초기부터 둘의 관계성과 서사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비와 에이바가 개인의 쓸모에 대해 품는 불안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원치 않게 워리어 넌이 돼서 제 쓸모를 증명하려 고군분투했던 에이바가 비의 격려에 힘을 얻고 스스로 워리어 넌으로서의 책임에 눈뜨는 과정이나, 스스로가 가치 없게 여겨져 완벽주의자가 된 비가 점점 사랑에 눈뜨면서 계획이 흔들리고 망가지는 과정을 보면 ‘과연 사랑이란 뭘까?’ 생각하게 된다.
제 몸을 희생해 비의 지구를 구한 에이바를 신의 세계로 보내주는 짧은 이별씬에서, 베아트리스는 에이바에게 “Be free.(자유로워져.)”라고 한다. 이 말은 그동안 타의에 의해 종교와 사명감에 얽매여있던 워리어 넌에서 에이바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람과 동시에, 비 자신 또한 수녀의 삶을 버리고 자아를 찾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연인을 잃고 수녀원을 떠나는 비의 발걸음엔 후회하거나 망설이는 마음이 없다. 팬들의 기대대로 둘이 이어지는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 둘은 자신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준 동반자를 만났다. 앞으로 비도 에이바도 각자의 세계에서 쓸모의 증명 없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