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년에세워진아사쿠사절은입구부터시선을사로잡는다. 무게백킬로의거대한제등, 소원을비는각종부적들이즐비하다. 절둘레에는작은상점들이다닥다닥붙어있으며, 주로선물용품과길흉화복을기원하는인형들을판다. 에도시대에는최고의번화가였다고한다. 아직도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상점들이 남아 있어 과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 1층에는 기둥 없는 19.2m x 108.8m 대공간이 있어 일본의 건축기술 수준을 짐작케 한다.
1927년 관동 대지진 이후 6층 이상 건물은 금지되었으나, 1958년 동경타워(333m)가 세워지고, 이제는 수많은 고층 건물이 스카이라인을 장식한다.
오다이바는 바다를 매립해 만든 지역으로, 1991년 스즈키 도지사가 개발했다. 흡사 이탈리아 베니스 같으면서도 현대적 스피드와 역동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미국사람들과 미국교포 사이에 인기가 폭발했던 도요타 전시장. 규모에 또한 입이 벌어졌다.
115m 높이 대관람차에서 바라본 야경은 신비롭고 웅장했다.
밤바다 위 작은 유람선과 반짝이는 무지개다리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하코네 온천과 후지산
하코네는 활화산 지대에 위치한 온천 관광지다. 후지산(3,776m)은 단봉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만년설 산이며, 화산 폭발로 생긴 아시호수는 호수 위로 장엄한 풍광을 선사한다. 유람선을 타고 한 시간가량 호수를 돌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구름에 가려 후지산의 전경을 볼 수 없었다.
오와쿠다니 유황 계곡에서는 끓는 온천수와 유황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삶은 검은 계란을 맛보며 여름 햇살처럼 모두 웃었다.
유황 온천장에서는 몸을 담그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십 년은 젊어진 듯한 기분에, 일행은 유황가루를 한 통씩 사가는 장면도 웃음을 자아냈다.
( 십여 년 후 집 청소 할 때 뜯지도 않은 유황가루가 나와서 버렸다)
일본 역사 강의에 빠지다
나라와 교토, 오사카는 일본 고대문화의 풍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에도(지금의 도쿄)로 수도가 옮겨지기 전까지, 1,500여 년 동안 국가 행정의 중심지였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들이다.
버스가 움직이자,
가이드 목상은 일본 역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본은 기원 후 3세기까지 강력한 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미개한 시대를 겪었다.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가 만주까지 세력을 펼치고 있었고, 중국은 위·오·촉 삼국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3세기말, 일본은 작은 부족국가가 연합하며 야마토라는 첫 고대국가의 틀을 만들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무녀 후미코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 금도장과 구리거울을 받아 여왕이 되었고, 그로부터 일본은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덴노에게 강력한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신격화하고, 712년 집필된 일본 최초 역사서 『고지키』는 덴노를 하늘의 자손으로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
이때 일본 신화와 인간 신 덴노가 결합하며 일본 고유 종교 신토(神道)가 형성되었다. 초대 덴노는 진무(神武)로 기록되어 기원전 7세기라 전해진다.
538년, 불교가 백제를 통해 일본에 들어오며 문화가 꽃피자 신토는 점차 전통 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지방 세도가의 등장과 내전, 12세기 사무라이 계급의 득세로 덴노의 권력은 약해졌다.
1560년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덴노(천황)는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은 쇼군에게 넘어갔다. 그의 죽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으나 15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265년에 걸친 에도 막부 시대가 열렸다.
그는 치밀한 계획과 냉혹한 수단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전국을 안정시키고 상업과 부의 기반을 다졌다. 그 결과 무사 계급 제도는 점차 쇠퇴하였고, 국민 생활은 이전보다 윤택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박 대통령은 독재 체제로 민주 세력을 억압했지만, 국민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인권보다 생존, 곧 ‘밥’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유지했지만, 미국 페리 제독의 강요로 문호를 개방하고 천왕이 실권을 잡으면서 명치시대가 열렸다. 국민의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며 덴노는 다시 신으로 숭배받았다.
개방 후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모방의 재능을 발휘했다. 경제적 부를 쌓고, 중국·한국·동남아시아를 영향권에 넣었다.
세계 1차·2차 대전에 참여하며 세계제패의 망상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투하로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역사를 듣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 인류사는 힘의 역사였고, 정권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영토를 넓힌 자가 영웅으로 추대된 것이 역사의 현실이었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 이후 UN이 설립되어 약소국 보호 의지를 보인 것은 인류사에서 한 걸음 진보한 사례다.
앞으로도 더 이상 힘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정의로운 국가가 지구촌 평화를 가능케 할 수 있을까.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 답을 가늠할 수 없는 채, 묵묵히 역사의 흐름을 되새겼다.
교토와 오사카
778년에 창건되고, 도쿠가와 장군의 명으로 재건되었다는 청수사에 올랐다. 교토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자리에 자리한 이 사찰의 본당에는 ‘십일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안치되어 있으며, 15미터에 달하는 기둥 139개가 건물을 받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장엄한 건축물 앞에서, 갑작스러운 경이로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라의 동대사와 법륭사 역시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천 년 이상 융성했던 일본의 불교문화가 한눈에 펼쳐졌다.
우리 문화재가 소박하고 꾸밈없는 순수함을 지녔다면, 일본의 문화재는 장식이 많고 복잡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작은 섬나라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넓은 국토만큼이나 뛰어난 문화재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오사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이 깊이 남은 도시였다. 그는 1583년 천하를 통일한 뒤 오사카성을 대축성으로 건설하고, 천수각 안에서 살았다. 수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으나 근래의 개수 공사로 오늘날 오사카 시의 상징이 되었다. 지상 8층의 천수각은 고대 고층 건축물로서 독특한 미를 자랑하며, 내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의 농군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집을 떠나 불우한 성장기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며,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위대한 쇼군이 되었고, 통치 기간 동안 화려했던 모모야마 문화를 완성한 인물로 기려진다.
그러나 그가 1592년 조선 정벌을 시작하며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으로 우리 민족을 고난에 빠뜨린 사실을 떠올리면,
그는 우리 역사에서는 천하의 원수와 같은 존재였다.
무리한 전쟁으로 병을 얻은 그는 1598년,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슬처럼 내리고, 이슬처럼 사라지는 내 몸이여.
세상만사 다 꿈속의 또 꿈이런가.”
그가 남긴 사세구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은 뒤, 조선 침략을 후회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나는 그 의미를 곱씹으며, 역사와 인간의 무게를 동시에 느꼈다.
귀를 항아리에 넣고 절여서
이곳은 왜군이 조선 정벌 당시 베어간 우리 병사들의 귀가 묻힌 곳이다.
전쟁 중 목숨을 잃은 병사의 시신에서 귀를 잘라 항아리에 넣고 절여, 전리품으로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근래에는 교포들이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참배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잔인성이 온몸을 전율하게 하는 듯 느껴졌다. 이름 없는 애국 영령 앞에서, 약소국가의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이 아픔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비록 가난했지만 선비사상으로 키워온 오천 년 역사의 문화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