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의 생각
영희는 요즘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나도 신이 나지 않았다.
친구들하고 뭉쳐 다니며 노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집에서도 그냥 맥없이 짜증 나고 말도 하기 싫었다.
엄마가 물어봐도 대꾸도 안 하고 뿔난 망아지처럼
산으로 들로 싸돌아 다녔다.
중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을 때는
마치 큰 언니가 된 것처럼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는 각 과목별 선생님이 따로 교실로 오셔서
수업을 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난생처음 영어를 배우는 시간에는 영어 선생님의
혀가 말려들어가는 듯한 영어 발음을 듣고
교실 안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는 소리로 가득 찼다.
키가 크신 국어 선생님은 시 낭송을 자주 해 주셨다.
시 낭송을 들으며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시를 외우고, 노트에 끄적거려 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영희는 미술시간이 가장 기다려지고 재미있었다.
피부도 하얗고 잘생기신 미술선생님을 처음 보는 순간
영희는 가슴이 콩닥거리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만화 속에서 쏙 빠져나온 주인공 같은 외모에 영희는
부끄러워 몰래 속으로 얼굴을 붉히곤 했다.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림 그리기에도 안간힘을 다 썼다.
영희뿐만 아니라, 반친구 대부분이 미술 선생님을 좋아했다.
3학년이 되면서부터 보충수업을 하게 되었다.
수업이 늦게 끝나고 집까지 가는 길도 멀다 보니
동네 친구들이 같이 모여 웃고 떠들면서 집으로 갔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애들이 저만치 앞서서
가기 시작했다.
맨날 웃고 떠들면서 같이 걸어갔던 하굣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여자애들만 따로 떨어져 그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야트막한 사춘기도 지나가고 영희는
꿈 많은 여고생이 되었다.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학급 반장을 하게 되면서
선생님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아서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 7명이 모여
'무지개'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이 모임 친구들은 한결같이 순박하고 착했다.
각자 좋아하는 색깔을 정했고,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몰려다니며 우정을 다졌다.
영희는 라디오를 끼고 살았는데,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나오는 편지 사연과 노래를 들으며, 늦은 밤까지 키들거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가끔씩 소녀 감성을 담은 사연을 적어 방송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하필이면, 중간고사 시험기간에 편지 사연이 방송을 타고 나오는 걸
선생님이 들으셨다. 다행히 많이 혼나지는 않았지만, 시험공부 안 하고
쓸데없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영희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성적은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영희에게도 대학교 진학과 맞서게 되었다.
선생님은 당연히 영희가 대학을 가는 줄 알고 계셨다.
성적도 상위권이라 충분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변 친구들도 선생님도 믿고 있었다.
영희는 혼자서 고민이 많아졌다.
머리가 하얗게 세신 부모님이 농사로 얻은 수익으로는
도저히 대학을 못 갈 것 같았다.
철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영희는 영희네 집이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인 줄 알고 자랐다.
하지만, 빨리 철이 들어버린 영희의 속마음은 애가 타 들어갔다.
영희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의 시낭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꿈을 키웠고,
여고생이 되면서부터는 그 꿈은 더 확고해졌다.
그래서 공부도 더 열심히 했고, 혼자서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영희의 꿈을 그대로 인정해 주질 않았다.
영희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지만, 부모님의 힘겨워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대학 가겠다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시로 나가 돈을 벌면서 야간대학을 다니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도 몇 번이나 대학을 권유했지만, 영희의 생각은 확고했다.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영희의 생각은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남게 되었다.
다음 이야기는 제6화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