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이야기
나에게는 한 명의 형과 누나 넷이 있다.
막내 누나와 나는 네 살 터울이고, 초등학교 때까지만 한집에서 누나들과 살았다. 첫째와 둘째 누나는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막내 누나마저 멀리 떨어진 시내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시골집에는 부모님과 어린 나만 남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는 날 외에는 저녁이 되어도 저녁밥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만 있을 뿐, 집안은 늘 조용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맏이인 형은 부농을 꿈꾸며 ‘영농후계자’라는 거창한 타이틀과 정부의 융자를 받아 젖소를 몇 마리 들여와 키웠다. 당시 낙농업이 인기였던 것인지, 정부의 장려 정책이 과했던 것인지 너도나도 젖소를 길렀고, 형님이 어린 젖소를 힘겹게 길러 우유를 짜 팔 수 있을 즈음에는 우유 생산이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 원유 가격은 생산 원가를 충당할 수 없을 만큼 하락했고, 원유를 납품하려면 집유 업체나 낙농조합을 확보해야 했지만 공급 과잉으로 원유 값 하락을 우려한 기존 낙농업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납품처를 찾지 못했다.
형님은 70년대 말 울산의 현대자동차에 취업해 일하다가 군 입대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생산직이긴 했지만 지금의 현대자동차의 위상을 생각하면, 휴직이 아닌 퇴사를 결정한 것은 형님에게 후회로 남을 선택이었다. 이후의 일들만이라도 잘 풀렸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영농후계자가 되어 젖소를 들여오고 원유를 생산하기까지 형님의 도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다.
형님은 이웃집과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둔 친척의 논을 빌려 축사를 지었다.
젖소를 키우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젖소를 키우기 전까지는 어느 집 할 것 없이 집안 헛간에 소 한 마리씩은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축산 폐기물이나 오물 냄새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집 농사용으로 키우는 소에서 나는 마구간 냄새와 전문적으로 키우는 젖소 축사의 냄새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을 일이 벌어진 뒤에야 형도, 냄새를 참아야 하는 이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축사 냄새가 부각되기 전까지, 어린 나에게 우리 집에서 한우도 아닌 젖소를 기른다는 사실은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남의 자식들은 다들 도시로 나가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데, 당신의 아들은 아무리 정부 보조금을 받아 시작한 일이라 해도 한 마리에 200만 원이 넘는 젖소를 사 와 키운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모험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이좋던 이웃들로부터 축사 냄새에 대한 불평을 듣게 되자 자식의 사업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이로 인해 형님과의 사이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형님은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축사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길 계획이라며 이웃을 설득했고, 젖소가 자라 착유가 가능한 성우가 되어 젖을 짜 팔아 돈을 벌게 될 순간을 기대하며 힘든 시절을 버텼다. 그러나 원유를 생산하고도 집유 업체를 찾지 못하자 형님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막내 누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형님은 키우던 젖소를 헐값에 팔고 도시로 떠나버렸다.
누나와 형이 떠난 고향집은 금세 생기를 잃고 적막한 기운만 가득했다.
다행히도 토요일 오후가 되면 셋째, 넷째 누나는 집으로 와 주말을 보내고 늦은 일요일 오후 시내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누나들과 떨어져 주중을 보내다가 다시 만나는 주말은 내게 정말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누나들에게도 그 주말은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전적으로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는 누나들에게는 어김없이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 몫의 일도 늘 정해져 있었다. 일요일에도 누나들은 시내로 가는 막차 시간 전까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나는 누나들이 시내로 돌아간 뒤에도 논이나 밭에 남아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중간에 일을 놓고 시내로 떠나는 누나들이 부럽기도 했고, 다시 누나들을 만나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일요일 오후만 되면 마음이 우울해졌다.
누나들이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마을 앞 굽은 비포장 길을 지나 면 소재지까지 걸어가야 했다. 누나들이 시내 자취방으로 갈채비를 하기 위해 집으로 내려간 후,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버스를 타기 위해 꾸불꾸불한 그 길을 두 누나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는 늘 뒷산 아래 논에서 내려다보았다. 두 누나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면소재지의 골목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누나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누나들 뒤를 한참 더 따라갔다. 이내 쌀쌀한 저녁 바람이 산과 들을 감싸고,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면 그제야 나는 누나들을 놓아주지만 먹먹해진 마음은 계속해서 여운으로 남아 쓸쓸함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