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지 않으면 흩어지는 평범한 일상
그해 봄의 시작은 다른 봄과 다르지 않았다.
겨우내 추위를 이겨낸 쌀보리는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고, 논두렁의 잡초들 사이에 피어난 여린 봄꽃들은 진초록 들판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아직 벼농사를 짓기에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아 보리밭 사이의 흙은 가벼운 발걸음에도 부스러지며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따스한 봄 볕을 받아 들판의 모든 것이 밝게 빛나는 낮 동안의 봄 들판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해가 뒷산 너머로 넘어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들판의 모든 것들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해거름 녘을 더 좋아했다. 이 시간은 고요했다. 이 계절의 저녁 공기는 따듯했다. 어디선가 들판의 풀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면 나는 그 향기를 조금이라도 많이 느끼기 위해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 시간은 하루가 끝나는 쉼의 시간이었고, 아버지의 하루도 마무리되는 시간이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들에 나갔던 아버지는 늘 어머니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호미질 한번 더, 잡초 한 개라도 더 뽑아야 하는 성격이라 아버지 보다 더 빨리 집에 도착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하루일을 마무리한 아버지는 어두운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칠흑 같은 방 안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늦게 돌아온 만큼 저녁상도 늦어졌고, 종종 아버지의 잔소리와 짜증으로 그 적막이 깨지기도 했다. 부부는 특별한 대화 없이 대부분의 저녁을 보냈다. 이렇게 누나들과 형이 도시로 떠난 뒤 우리 집은 늘 고요하기만 했다.
그 시기 둘째 누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누나의 결혼 날자가 임박하자 어머니는 바쁜 농사일을 잠시 미루고, 누나의 막바지 결혼 준비를 돕기 위해 누나에게로 갔다. 어머니가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워낙 건강하고 잔병도 없던 분이라, 어머니와 나는 잠깐 스치고 지나갈 몸살이겠거니 여겼다. 그렇게 며칠을 버텼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린 나에게 맡긴 채 누나에게로 갔다.
어머니가 떠난 주말 일요일, 며칠째 방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한 해 벼농사의 시작인 못자리 만드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는지, 오전 내내 철없이 밖에서 놀다 돌아온 나를 불러 오후에 함께 논으로 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편치 않은 몸상태 때문에 오후 늦게서야 대나무 활대 한 다발을 지게에 지고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지게를 졌다. 볏짚과 땔감, 쌀가마니, 농기구에 두엄까지 지게로 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짊어졌다. 아버지의 어깨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날 지게에 짊어진 짐이 아버지 삶의 마지막 짐이었다.
나는 돌부리 투성이의 거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아버지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논으로 가는 길의 절반쯤 되는 마을 당산나무 앞에서 아버지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동훈아, 아버지가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일을 못하겠다. 다시 집으로 내려가자!”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 누나에게 갔던 어머니가 소식도 없이 돌아와 있었다. 마루에는 아버지가 말끔한 옷을 입은 채 누워 있었다. 나는 마루에 올라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으며, 막내아들인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손에 쥔 하얀 손수건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내 병원 응급실로 갈 채비를 마치고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사인은 급성 간경화였다. ‘급성’이라는 말은 그렇게도 잔인해서, 우리 가족에게 충분한 이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버지와 함께 할 내일은 없었다.
일주일 남짓의 짧은 투병, 입원 하루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아버지.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아버지와의 기억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애써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한두 장면 만이 떠올랐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겪은 모든 일이 저절로 기억 속에 남아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상 깊은 사건들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만, 늘 곁에 있어 내일도 당연히 계속될 거 같은 평범한 일상은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무의식의 강을 건너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해 나의 중학교 2학년 봄은 이전의 봄과는 다른 아버지와의 작별로 끝이 났다.
Epilogue
첫 번째 삽화는 Chat GPT를 이용해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쳐 그렸습니다. 여러 번 수정 요청을 했는데 Chat GPT는 요구사항이 많아질수록 그림을 더 안 좋게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네요. 결국은 Gemini로 마무리했습니다.
1.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넘어갔고,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해가 진 뒤의 여명이 조금 남아 있는 밝기입니다. 산은 검은 그림자에 가깝게 표현하고, 그 앞에는 시골 마을이 보이도록 해 주세요. 마을의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이 연기들은 일정한 높이에 이르러 서로 만나 공기 중에 층을 이루는 모습으로 표현해 주세요. 마을 앞에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고, 논두렁에는 어둠 속에서도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는 들꽃들이 보이도록,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일러스트 드로잉 스타일의 삽화를 그려 주세요.
2. 굴뚝의 수는 너무 많지 않게 약 3개 정도로 줄여 주세요. 연기는 너무 진하지 않게, 목성의 구름띠처럼 잔잔하고 연하게 공기 중에 띠를 이루도록 표현해 주세요.
3. 연기가 서로 완전히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중간 희미하게 끊어진 느낌으로 그려 주세요.
4. 들꽃은 너무 빽빽하지 않게, 잡초 사이에 듬성듬성 피어 있는 모습으로 표현해 주세요. 또한 보리밭은 하나의 넓은 밭이 아니라, 약 3개의 층으로 나뉜 계단식 구조로, 낮은 논두렁으로 구분되도록 그려 주세요.
5. 구름은 이전 그림처럼 더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현해 주세요. 들꽃은 너무 적지 않게 적당히 늘려 주고, 논두렁 사이에도 작은 들꽃을 몇 개씩 추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