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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Jun 14. 2024

베를린 악마의 시

위대한 쇼맨, Rammstein

고등학생 시절에 다니던 학원에 한 친구가 있었다. 여자아이였는데, 본심은 착했지만 늘 말에 가시가 있었던 게 문제였다. 어쨌든 나의 메탈음악 취향에도 자주 태클을 걸던 친구였는데 나와는 다르게 윤상이나 김현철 같은 국내 가수들을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생일이 다가왔고, 나는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아마 앞서 언급한 그 가수들 중 하나의 CD를 선물로 샀을 것이다. 문제는 선물을 건네주려고 했던 순간에 그 친구가 "너 또 이상한 거 네 취향대로 사 온 거 아니야?"라고 하며 날 도발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뭔가 빈정이 상했던 나는 살짝 짓궂은 마음이 들어 원래 포장되어 있던 선물을 조심스레 뜯어서 내가 갖고 있던 메탈 CD 중에 표지가 가장 흉악했던 걸로 선물을 바꿔치기해 버렸다. 그리고 포장지를 뜯은 그 친구는 표지를 보자마자 당혹스럽게도 울음을 터뜨렸고(그 정도로 무서웠나...), 나는 "야, 장난이야. 장난. 네 선물 여기 있어." 하면서 본래 산 음반을 건네주었다. 그날 표지만으로도 그 친구를 울린 문제의 앨범이 바로 밴드 Rammstein의 Sehnsucht였다.

우..울디망...

앨범 커버와 마주하고 울음을 터뜨려버렸던 그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사실 나에게도 Rammstein이라는 밴드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내 기억에 아마 모 편집앨범에 수록된 'Du Hast'라는 곡으로 이들을 처음 접했던 것 같은데, 전주 부분의 연주와 사운드는 너무나도 훌륭했기에 바로 압도되었지만, 노래가 문제였다. 람슈타인의 보컬에 대한 첫인상을 말로 표현하자면, 마치 배 나온 독일 아저씨가 한 번에 맥주를 3000cc 정도 원샷한 후에 만취한 상태로 혼자 흥에 취해 손에 잡히는 독일 시집을 펴서 아무 구절이나 랜덤하게 악쓰면서 내뱉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멜로디도 아니고 그로울링도 랩도 아닌 그 미묘한 창법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갖고 '아니, 이런 훌륭한 연주를 갖고 있는 밴드가 왜 굳이 이런 보컬을...?'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한 내 첫인상이 바뀌게 된 계기가 두 번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바로 'Mutter'라는 앨범의 오프닝 트랙인 'Mein Herz Brennt', 그리고 'Reise, Reise' 앨범의 'Mein Teil'이라는 곡을 듣고 그 특유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 보컬에 대한 생각을 바꾼 계기였다. 후렴이 아니라 인트로와 verse 부분에서 사악한 목소리로 목을 눌러가며 힘겹게 내뱉는 톤이 있는데 무성영화인 '노스페라투'의 뱀파이어 올록백작에게 목소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기분 나쁘고 음험한 음색이었다. 두 번째 계기는 앞서 말한 'Mein Herz Brennt'의 Piano Version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된 것이었다. 원곡의 드라마틱하면서도 헤비한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이 버전은 미니멀한 피아노 연주에 시를 낭독하듯이 읊조리는 보컬만이 곡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있는데, 뮤비에서 보여주는 보컬의 기괴한 표정연기와 몸동작이 슬프면서도 기괴한 인상을 풍기면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영상을 본 후에 나는 Rammstein의 보컬 Til Lindemann이 메탈씬에서 가장 개성적이면서도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아티스트 중 하나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음악도 뛰어나지만 람슈타인은 콘서트에서의 화려하고 엽기적인 퍼포먼스로도 유명하다. 마치 태양의 서커스와 싸구려 포르노 야외촬영이 인더스트리얼 메탈음악과 결합된 느낌이랄까? '저 사람들 저래도 괜찮은 걸까'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불을 뿜어대는 건 기본이고 입 안에 전구를 설치한다든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와 스케일로 보는 이들에게 스펙타클한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야하고 폭력적이기도 한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기행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한다. 쇼맨십이 뛰어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는 후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디스코그라피 전체에서 최악의 앨범으로 뽑을 만한 음반이 딱히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로 시종일관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음악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아~해보세요

개인적으로는 1997년작인 'Sehnsucht'와 2001년작인 'Mutter'를 이들 최고의 앨범으로 생각하고, 처음 람슈타인을 듣는 이들에게 입문 앨범으로도 추천할 만하다고 느낀다. 임팩트 면에서는 2005년작인 'Rosenrot'가 가장 좀 약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앨범의 2번 트랙인 'Mann Gegen Mann'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금방 마음이 바뀔 것이다. 항상 기괴하고 도발적인 람슈타인이지만 의외로 기복이 없고 늘 뛰어나다. 보컬인 Til Lindemann을 비롯해 멤버들이 솔로 활동도 하고 프로젝트 밴드도 하는 등 개인의 활동도 활발하지만 음악적으로 람슈타인만큼은 못한 것을 보면 이들 개개인도 뛰어난 뮤지션이지만 역시 함께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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