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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Jun 21. 2024

툴리가리 박사의 밀실

매드 사이언티스트, TOOL

누구든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 중에 유달리 괴짜 같은 이들이 존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나쁘지 않지만 어딘가 유머감각이 남들과는 초점이 다른 데에 맞춰져 있고, 이따금 웃기려고 하는 말들인 것 같은데 묘하게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그런 친구 말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친구는 문과인데도 불구하고 심심하다는 이유로 세계 명산의 해발고도를 외우고 주기율표까지 외우던 녀석이었다. 한 번은 그 친구의 학교에서 TV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상기했듯이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상식과 잡지식 면에서도 남달랐던 그 친구는 막힘 없이 답을 적어 내려 가며 끝까지 살아남았다.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OOO 학생, 그렇게 빨리 풀면 숨차지 않나요?"라고 농담 섞어 질문을 했는데 그 친구는 태연한 얼굴로 "답은 손으로 쓰는데 숨이 왜 차나요?"라고 대답했다. 참 그 친구다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날 그 친구는 골든벨을 울리는 데에도 성공했다.


다소 마초적인 느낌이 강하고 세간의 시선으로는 좀 단순무식해 보일 수 있는 메탈 씬에서도 이런 괴짜 천재 같은 팀이 존재한다. 음악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매니아들 사이에서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록밴드는 핑크 플로이드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밴드는 1990년대 초부터 장르 내에서 거물로 떠올라 현재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TOOL이다. "이번 앨범에서는 피보나치수열을 가사의 음절에 대입해 보았습니다."라는 얘기를 밴드의 멤버가 한다면 다른 팀이었으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라며 대차게 까였을 수도 있지만, TOOL이라면 이런 말에도 팬들은 열광하게 된다. '여기에 한 번 멜로디를 넣어볼 테냐'라는 기세로 막 나가는 괴랄한 박자와 리듬, 그에 대응하듯이 비정형적으로 들어가는 전혀 캐치하지 않은 멜로디, 극도로 음침하면서도 때로는 영적인 세계에 빠져드는 느낌까지 드는 오묘한 사운드와 분위기로 TOOL의 음악은 대중에게 어필하기 힘든 측면에도 불구하고 평단과 매니아의 인정은 물론이고 대중적인 성공까지 이뤄냈다.

저기...사진이 좀 흔들렸는데요...

개인적으로는 TOOL의 엄청난 팬이라고 자부하기는 힘들다. 기본적으로 나는 시끄럽고 난폭한 음악은 좋아해도 어려운 음악은 즐기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Hellblazer 시리즈(영화 '콘스탄틴'의 원작 만화책이다) 혹은 클라이브 바커나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을 때 이들의 음악은 몰입을 끌어올려주는 훌륭한 BGM으로 느껴진다. 물론 TOOL의 팬이라면 이런 내 얘기를 듣고 '감히 이런 훌륭한 음악을 책 읽는 배경음악 따위로 허비하다니!' 하면서 분노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그쪽으로 활용하는 게 더 주관적으로 즐겁다는 이야기다. 명반이라고 회자되는 두 앨범인 'Ænima'와 'Lateralus'는 곡의 짜임새도 훌륭하지만 일단 분위기가 주는 위압감이 엄청나기 때문에 공포를 다룬 작품을 읽을 때 궁합이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길이 자체가 긴 곡들을 그렇게까지 선호하지는 않기 때문에 앨범만을 독립적으로 들었을 때 내가 온전히 처음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몰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팬이라면 이 긴 러닝타임 동안 곡의 요소들을 하나씩 뜯어보며 굉장한 희열을 느끼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대단하고 어려운 곡들을 만드는 팀이니 멤버 개개인의 음악적 역량도 훌륭할 것이라 생각할 텐데 놀랍게도 드러머 대니 캐리를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들은 음악에 원래 종사하던 이들이 아니었으며, 기억이 맞다면 인터뷰에서 어떤 멤버가 스스로 "우리가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음악적으로 기량이 뛰어나고 연주를 잘하지는 못한다. 어쩌다 만들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프론트맨인 Maynard James Keenan은 더욱 독특한데, 한 때는 군인이기도 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가 밴드의 보컬을 맡게 된 경우이다. 게다가 더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가 취미 활동으로 스탠드업 코메디언으로도 활동했다는 부분이다. 한없이 어둡고 시종일관 격렬한 분위기로 듣는 이를 압도하는 TOOL의 음악의 이미지메이커가 실제로는 개그욕심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진다. 실제로 그는 본인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개그 컨셉의 밴드인 Puscifer를 TOOL 이상으로 진지하게(...) 이끌고 있으니 그의 개그 장인정신 역시 매우 진심인 것이다. 단, 그의 유머감각이 대중적으로 먹힐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있는데 이런 괴짜 같은 센스 역시 TOOL의 프론트맨답다고 생각한다.

웃으세요...쳐맞고 싶지 않으면...

TOOL의 디스코그래피를 훑어볼 때 시기에 따라 이들의 앨범이 달라지는 걸 느껴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다. 첫 앨범인 'Undertow' 때부터도 밴드의 기량은 훌륭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스타일이 정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에 갇힌 야수 한 마리가 자물쇠를 물어뜯고 뛰쳐나오려고 기를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후 이들의 개성이 완전하게 빛을 발한 두 앨범 'Ænima'와 'Lateralus'가 발매되며 TOOL 특유의 사운드가 온전하게 자리 잡혔다고 생각한다. 'Lateralus' 이후 5년 만에 발매된 네 번째 정규앨범인 '10,000 Days'에서는 조금 더 여유가 느껴지고, 예전보다는 좀 더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생각도 드는데, 괴랄한 그루브는 여전하지만 첫 곡인 'Vicarious'는 얼터너티브 메탈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리프와 진행이 돋보이고 'The Pot'은 모처럼 수려한 멜로디와 탱탱한 베이스 사운드가 전면으로 치고 나오면서 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는 느낌이지 않나 생각한다. 이후 13년 만에 발매된 'Fear Inoculum'에서는 아예 무언가 초탈해 버린 도인과 같은 풍모까지 보이는데, '10,000 days'에서 조금이나마 느껴졌던 편의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막 나가는 전개와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절대로 쉽게 터뜨려주지 않겠어'라는 특유의 철학이 느껴지는 뚝심 있는 곡 구성으로 메탈씬의 일반적인 문법에 타협하지 않는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이러한 높은 진입장벽에도 불구하고 발매 당시에 빌보드 차트에서 테일러 스위프트까지 끌어내리며 1위로 등극하였으니 호불호를 떠나 대단한 밴드라고 생각한다.

좀 더 기량을 닦고 와라, 애송이

이렇게 무적에 가까운 TOOL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무대에서 야유를 당하고 심지어 물병 투척까지 당했는데 그 충격의 무대는 놀랍게도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2006년에 메탈리카 내한 당시에 서포트 밴드로 무대에 섰는데, 두 밴드 모두를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는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겠지만 오로지 메탈리카만을 보러 온 열성팬들이 TOOL 특유의 사운드와 긴 곡 전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연 내내 "TOOLong"이라며 야유를 보내고 무개념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세계적으로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인정받는 밴드에게 엄청난 푸대접을 한 것이다. 아마 이 때문에 이후에도 한국에서 TOOL의 무대를 만난다는 건 아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1,000만 장 이상 앨범을 팔아치우고 현시대 팝계에서 가장 강력한 네임밸류를 가진 테일러 스위프트도 이겨버린 TOOL에게 무개념 메탈 팬의 물병 투척 따위는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 하나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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