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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Jun 06. 2019

도쿄의 이색 장소 탐방기 #1

시부야의 클래식 LP 카페 라이온

일본 좀 다녀봤다는 여행객들에게 도쿄의 라이온이라 하면 흔히 긴자에 있는 생맥주집을 떠올린다. 명품 브랜드의 대리점과 고급 면세점, 정치인들의 뒷거래가 오갈 듯한 비싼 가이세키 요릿집만으로 도배된 듯한 긴자의 거리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퀄리티의 생맥주와 안주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여행객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야기할 라이온은 그 맥주집과는 관련이 없는 클래식 LP 카페이다.

한국에도 한남동이나 신촌에 LP 음악을 틀어주는 바가 상당수 존재하지만 라이온의 대단한 점은 1920년대에 오픈했다는 점이다. 1950년도에 같은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대적 공사를 진행했다고는 하지만 처음 오픈했을 때의 인테리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사실 1950년에 오픈해서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그만으로 대단한 것이다. 더욱 신기한 점은 이 카페가 시부야 거리에 위치해있다는 점에 있다. 시부야는 일본 제1의 도시인 도쿄 안에서도 흔히 젊음의 거리, 최첨단의 공간으로 치부된다. 그만큼 새로운 가게와 유행이 계속 들어오고 오래된 가게는 새로운 트렌드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일이 잦다. 그런 곳에서 90년 넘게 클래식 음악만 틀어주는 LP 카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부야의 상징 중 하나인 109 건물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골목으로 방향을 트니 지저분한 술집과 오래된 러브호텔들이 줄지어 서있다. 라이온은 시부야의 한 복판이라고 믿기지 않는 비주얼의 퇴락한 유흥가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다. 건물의 모양새는 더 신기하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유럽 풍의 커피하우스 같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놀이공원의 귀신의 집 같기도 한 독특한 외관이다. 입장하는 문에는 사진 촬영 금지, 잡담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명색이 카페인데 안에서 잡담을 하면 안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진출처: Tosh Berman, http://tamtambooks-tosh.blogspot.com

내부 인테리어는 더욱 독특하다. 마치 도서실 같이 모든 자리들이 한 방향만을 향해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사람 두 명의 키를 합친듯한 크기의 대형 스피커들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흘러나오는 음악의 볼륨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적당하다. 출력을 최대로 하면 귀를 찢을 수도 있겠다 싶은 대형 스피커에서는 무시무시한 비주얼과는 다르게 따뜻하고 포근한 기온을 품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자리를 안내받고 앉으니 실제로 1950년 이후로 의자를 바꾼 적이 없는 건가 의심이 갈 정도로 의자의 쿠션이 아래로 푹 꺼진다. 메뉴 역시 최소 30년 이상 바뀐 적이 없는 듯하게 단순하고 소박하다. 커피와 차 몇 종류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완고하게 주장하는 듯한 메뉴판에서 커피를 선택하고 앉으니 물 한잔을 내어온다.

사진출처: https://en.goodcoffee.me/coffeeshop/lion/

가게 자체만큼이나 손님들의 기운도 심상치가 않다. 40대 아주머니부터 70대 노인, 젊은 서양인 여행객들이 일제히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감상한다. 그 와중엔 책을 읽는 사람도, 가계부를 정리하는 아주머니도 존재하지만 80% 이상의 고객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온전히 빨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나 역시 그 사이에 끼어서 조용히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미리 정해진 점심 약속을 위해 자리를 일어선다.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로 머리를 탈색한 젊은 종업원이 친절한 미소로 계산을 하고 배웅하는데, 전에 듣기로 이 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 역시 돈보다는 가게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서, 오래된 가게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의지로 여기에서 일하기를 택한 클래식 애호가들이라 한다.


같은 날 저녁, 아침에 들렀을 때의 여운이 남아 폐점시간을 1시간 30분 앞두고 다시 들러보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운 탓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점원의 표정에서 지친 기운이 역력하다. 자리 잡고 앉아 다시 책을 읽고 있다 보니 어느새 폐점시간을 45분 앞두고 있다. 점원이 앞으로 가더니 LP판을 교체한다. 지금껏 살면서 들어보지 못한 굉음에 가까운 오묘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분명 클래식이 맞긴 한데 아침에 나왔던 포근한 음악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귀를 긁어대는 듯한 불쾌한 실험적인 음악이다. 직원의 퇴근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투영된 선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지금 정리하고 계산을 미리 해놓겠다고 직원이 다가온다. 클래식에 대한 열정도, 전통 수호에 대한 의지도 역시 인간의 퇴근에 대한 열망을 꺾을 수는 없는 듯하다. 다음에 다시 들를 때는 꼭 아침에 오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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