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ЯN - Issues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까지는 아니어도 반에서 제일 잘하는 정도는 되었고, 오로지 대학진학만이 공부의 목표인 대한민국 입시교육의 폐해라고 해야 할지, 대학 진학과 동시에 동기부여를 상실한 나의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어쨌든, 당시에 공부를 잘하는 편인 학생이었다는 점은 나의 청소년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피해가 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시절을 제외하면 말이다.
우리 반에는 특이하게도 집이 굉장히 부자인 학생이 있었다. 그냥 뭐 집에 돈이 좀 많다 정도가 아니라, 들으면 알만한 재벌가의 3세, 4세 정도 되는 아이였다. 말투가 조금 경박하고 건들건들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나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은 아니었고, 1학기 반장까지 맡은 나름 건실한 학생이었다. 적어도 나와 얽히기 전까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이런 말을 했다. "OO이(위에 말한 친구) 어머니가 그 아들을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 옆에 좀 앉혀달라고 부탁하시던데... 뭐 너의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하진 않지?" 내 입장에선 '이게 무슨 말이지? 요즘은 학생 자리 배치도 학생의 허락을 맡고 하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냥 "아... 네... 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쨌든 그날부터 나와 그 친구는 짝이 되었고, 베프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잘 지내고 있었다. 적당히 서로 장난도 치고, 생일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자발적으로 원해서 날 초대한 늬앙스는 아니라서 가지는 않았지만). 가끔 그 녀석의 말들이 선을 넘어서 기분이 조금 나쁜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 남자 고등학생들이 다 할 법한 수준의 저속한 말들이라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몇 주가 지난 시점부터 발생했다. 반에서 오늘 자리 배치를 바꾼다고 해서 '아... 누구 짝이 되려나'하고 있었는데 모두의 자리가 바뀌었지만 우리 둘의 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제야 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어? 현석이가 괜찮다고 지난번에 해서 동의한 줄 알았는데? 왜? OO이가 힘들게 하니? 뭐 그렇다면 바꿔주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긴 했지만 딱히 힘들 정도는 아니었기에 일단 알았다고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내가 느낀 그 미묘한 이상함과 답답함을 느낀 건 피차 마찬가지였던 것인지 이제 그 녀석이 이상한 방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나에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살짝 선을 넘던 그 친구의 장난 섞인 조롱은 심한 패드립과 욕지거리로 심화되었고 그 빈도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본래는 그냥 동급생끼리 할 수 있는 장난인 수준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악의가 느껴졌달까.
시간이 더 지나고 몇 차례 자리 이동이 더 있었지만 우리 둘의 자리는 여전히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녀석의 욕과 패드립은 경계를 모르는 듯 심해져만 갔다.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기분이 너무 상하는 말들이었고 맥락도 끝도 없는 수준이었기에 이는 마치 내 귀에 악마가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같이 욕으로 받아쳐보기도 하고 몇 대 때려보기도 했지만 우습다는 듯이 아랑곳하지도 않고 계속되는 그의 말들은 내 귀와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후 한 두 차례 더 담임을 찾아갔지만 그는 그냥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말로는 '괜찮다. 너가 힘들면 조정해 주겠다.'라고 하지만 깔려있는 속뜻은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적당히 너가 맞춰라'라는 늬앙스가 짙게 느껴졌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괴수의 입 속에 갇힌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내가 부조리의 한가운데에 갇혀있는 느낌이라 억울하고 분하기만 했다.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집에 간 어느 날, 거실의 선반에 놓여있는 송곳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본래는 드라이버와 함께 공구 세트의 일부분인 것 같았는데 굳이 저런 게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끝이 유달리 뾰족했다. 순간 '저걸 가방에 넣어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가방에 넣어가서 그 자식의 손등을 저걸로 찍어버리면 그놈의 입을 좀 다물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히 범죄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엔 이게 정답인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는 폭언에 피폐해져 있었다.
물론 그 시기에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에서 친한 친구도 사귀었고, 아주 친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얘기를 주고받으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급우도 많았다. 그런 친구들 중 하나가 대화 중에 내가 당시에 매트릭스 OST나 메탈리카 S&M 음반 같은 걸 통해서 락과 메탈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듣더니, 어느 날 이게 진짜배기라며 나에게 CD 한 장을 들어보라며 가져왔다. 고맙게도 듣고 싶을 때까지 듣다가 돌려줘도 된다며 기한 없이 나에게 빌려준 음반이 바로 Korn의 4집 앨범인 Issues였다.
CD 플레이어에 음반을 재생하고 느낀 첫인상은 좋게 말하자면 신선하다는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런 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들었던 곡들 중에 가장 빡센(?) 넘버들은 마릴린 맨슨의 Rock is Dead, 메탈리카의 Battery,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Wake Up' 정도였다. 이따금 괴성이 섞여있고 욕을 걸게 하는 곡들도 있었지만 신나게 내달리는 느낌의 상식 안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반면 Korn의 앨범은 사운드부터 지하를 뚫고 저 지옥의 내핵까지 도달할 것 같은 저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무리 내달려도 도저히 신나다고는 할 수 없는 음침한 정서가 모든 곡에 짙게 깔려있었다. 무엇보다 보컬 조나단 데이비스의 창법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랩도 아니고 멜로디도 아니고 스크리밍이나 그로울링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 읊조림과 징징거림과 절규가 융합된 괴성은 처음엔 당혹스럽고 시간이 지나니 어이가 없어서 좀 웃기다가 나중엔 무서워지는 기괴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나에게 락과 메탈의 이미지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이었다.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 같은 덩치와 인상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면서도 굳이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교실 맨 뒤에서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그런데 콘의 음악은 내가 아는 메탈과는 전혀 달랐다. 이건 그냥 괴롭힘의 한복판에 놓인 피해자의 한 맺힌 절규와 자조 그 자체였다.
적극적으로 미소를 띠며 나에게 음반을 권해준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왠지 들을수록 불쾌한 기분이 들어 며칠 만에 다시 앨범을 돌려주며 "어... 이게 묘하더라...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라고 했더니 친구는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사실 콘은 3집이나 1집이 더 좋아."라고 대답했다. "어... 그래... 그렇구나...(아마 찾아서 듣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나와 콘의 인연은 끝나는 듯했으나, 왠지 나도 음악 좀 더 잘 아는 놈이 되고 싶다는 묘한 승부욕이 발동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니 묘하게 그 음침한 목소리와 사운드가 생각나고 땡기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가 좋다던 그 3집과 1집 앨범의 곡들을 호기심에 하나씩 찾아 들어보다가 결과적으로 나는 우리 학교의 제일가는 Korn 신봉자가 되고야 말았다.
희한하게도 Korn에게 홀린 이후 나의 피폐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더니 스트레스가 해소되어 현실을 잊게 되었다' 같은 단순한 맥락은 아니다. 당시에는 밴드 자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았기에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아, 이 노래를 하는 사람은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았고, 나와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이 음악을 통해 공감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치유받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학교에 흉기를 가져가 동급생을 찌르고 사고 치는 것보다는 울분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락스타가 되는 게 더 멋있는 게 아닐까?'라는 인생의 새로운 동기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후 나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부탁하여 메뚜기처럼 자리를 바꿔가며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담임이 안 바꿔주면 내 자리는 내가 만들면 된다'라는 생각이었달까. 다행히 친구들도 내 뜻에 따라주었고, 나의 짝꿍(...)도 다른 친구들에게는 이상하게 구는 놈이 아니었기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따금씩 멀리서 그놈이 나에게 종이쪼가리를 던진다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적당히 무시하거나, 심할 땐 나도 다가가서 욕 몇 마디 뱉어주면 그만이었다. 담임도 처음엔 좀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굳이 나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는지 건드리지 않았고, 몇 주 후에 우리의 자리 배치가 바뀌면서 나와 그 녀석은 드디어 공식적으로도 짝이 아니게 되었다.
유달리 종이 쪼가리 던짐이 심하고 욕이 건너편에서 많이 들리던 날 '아 이제 진짜 한 대 또 때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던 순간 갑자기 그 녀석이 내 앞으로 왔다. "야 나 유학 간다. 안녕." 이 말을 마지막으로 거짓말 같이 그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묘하게 그 이후의 1학년 생활은 내 기억에서 흐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나는 락스타도 아니고, 이제 불혹의 나이로 생업과 밴드일을 겸하고 있는 평범한 인디밴드의 보컬(혹 누가 보기엔 취미로 직장인밴드를 좀 진지하게 하는)일뿐이기에 Korn의 음반이 나에게 설정해 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척박한 한국 메탈 씬에서 15년 넘게 밴드를 하면서 내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이따금씩은 밴드 경력에 락페 진출이나 해외 공연, MBC 라디오 방송에 우리 곡이 나왔어요 같은 빅이벤트들을 추가하고 있으니 절반의 성공은 이루어냈는지도 모른다.
미국으로 건너간 나의 짝은 그 이후에 연락이 끊겨 어떻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건너서 들은 얘기로는 나름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는 데에 성공했고, 매우 착해진 대신에 살이 많이 붙었고 피부가 매우 안 좋아졌다는 것 같았다. 뭐 원래부터 극악무도한 놈은 아니었으니 그 친구가 어디 뒷골목 약쟁이로 살다가 총 맞아 사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쉽거나 한 정도까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친구가 그렇게 막 나빴던가 하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름대로는 장난도 걸고 생일 초대까지 했는데 계속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나에게 억한 심정이 들었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우리 둘만 자리가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나와 같은 배를 탄 입장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의 담임선생님에 대해서도 크게 나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첫날 나에게 제대로 설명을 했는데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내가 다 알아듣고 납득했는데 이후 기억이 왜곡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애초에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학교에서 단지 돈이 많다는 이유로 한 학부모의 요청을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20년이 넘은 일이니 지금 와서 굳이 누굴 탓하고 싶지도 않고, 지금의 나였다면 더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별 것 아닌 일들이 묘하게 쌓여서 나쁜 기억으로 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당시의 일을 계기로 음악이라는 취미에 더 깊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고 덕분에 삶이 더 윤택하고 풍부해진 것일 수도 있다.
Korn의 4집 Issues는 지금도 나에게 있어서 콘의 앨범 중에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아하는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 정도일 뿐이고, 그렇기에 아주 좋아하는 음반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내가 메탈 밴드를 깊게 좋아하게 되고 지금 같은 음악을 하게 된 시작점에 있는 앨범이고 그렇기에 굉장히 소중하다. 누가 나에게 '뉴메탈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앨범의 수록곡인 'Falling Away From Me'와 'Trash'를 가장 먼저 들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Korn의 Blind나 Limp Bizkit의 Break Stuff로 뉴메탈을 정의하지만 나에게 있어 나의 뉴메탈 외길인생의 시발점은 Korn의 Issu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