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CD와 LP의 중요성을 외치다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어떤 책자에서 런던의 어떤 거리는 전체가 음반 가게로 가득 차 있다는 글을 보고 "그렇다면 음악 애호가로서 안 가볼 수 없겠군!!"이라는 생각을 하고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그곳으로 향한 적이 있다. 거리 전체가 음반가게라는 말은 좀 과장된 부분이 있었으나 실제로 꽤 많은 레코드샵들이 포진해 있기는 했다.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가게의 수만 많은 게 아니라 EDM, 클래식, 인디 락 등 각 장르에 집중한 샵들 위주였기 때문에 여러 점포를 들러도 각각 다른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구경만 하기는 좀 미안해서 점포별로 되도록 CD를 하나씩 구매하고 대신 답례로 샵의 주인이나 일하는 직원들에게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카메라를 직접 쳐다보는 이도 있었고 갑자기 음반을 정리하는 척하는 사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을 테니 알아서 찍어달라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경험이다.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일본에서 한 적이 있다. 시골 소도시인 히타라는 곳에서 작은 음반점을 들러 표지가 예쁜 중고 LP를 싼 가격에 산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선 LP가 비싼데 작정하고 일본에서 좀 사볼까?'라는 생각을 갖고 와이프와 함께 오사카와 교토의 레코드샵을 4~5군데 정도 돌았다. 오사카의 아키하바라라고 불리는 덴덴타운에서 시작해서 교토의 기온 거리에서 끝나는 대장정이었는데 중고 레코드샵에서 Stan Getz의 베스트 앨범을 포함한 중고 재즈 vinyl 몇 장과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 싱글 CD, 타워 레코드에서 Rage Against the Machine의 'Battle of Los Angeles'와 '마녀배달부 키키'의 OST, 교토의 힙합/EDM 레코드 전문점 Jet Set Records에선 해당 점포에서 밀어주는 듯 잘 보이는 가판대에 놓여있는 힙합 유망주로 보이는 한 듀오의 CD(정작 집에 와서 들었을 땐 '잘도 이런 심각한 퀄리티의 앨범을 2023년에 만들어 판매했겠다'라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를 구매했다.
이전까지 우리 집에서 레코드판이라는 것은 그냥 표지가 크고 아름다워 거실이나 부엌의 선반에 장식용으로 두는 용도였으나 이 정도로 개수가 늘었으니 틀지 않고 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껏 구매한 LP판들을 하나씩 재생해 보기 시작했다. 씁쓸하게도 대장정의 시발점이 된 히타에서 구매한 중고 LP판은 너무 튀어서 재생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그래도 약 2개월간 예쁜 표지로 우리 집 주방의 선반을 장식해 주었으니 500엔 값어치는 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머지 음반들은 무사히 재생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디지털 음반들의 잡음 없는 깔끔한 소리에 비하면 묘하게 소리가 꿀렁거리는 느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거슬릴 수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vinyl record판만의 맛이 있었다.
이후에는 나름의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한 단계를 차곡차곡 밟았다. 부모님 댁에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LP 컬렉션의 먼지를 털고 다시 정리하고 좋아했던 앨범이지만 정작 내가 소유한 적이 없었던 Green Day의 명반 Dookie나 Last Action Hero와 End of Days의 사운드트랙, 빌 에반스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반 등을 사모으기 시작했고, LP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동안 정작 내가 청소년기부터 차곡차곡 모아 온 CD 컬렉션들이 구석 장롱에서 외면받는 것이 미안해서 CD들 역시 모두 꺼내어 알파벳 순서로 보기 좋게 정리해서 언제든 찾아서 꺼낼 수 있게 재정렬했다.
정리라는 과정을 즐기는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이 경우에는 LP판들을 정렬하면서, 오래 묵혀있던 CD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오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깨닫는 재미가 있었다. 'Queen 베스트 앨범은 나름 납득이 가지만 왜 부모님의 LP 컬렉션에 Skid Row가 끼어있는 것일까?', '왜 나는 Limp Bizkit의 3집을 2장이나 갖고 있는 거지?', '아무리 찾아도 Spawn 사운드트랙이 보이질 않네. 꽤 좋아했었는데', '4 Days in Geneve? 이 앨범의 정체는 뭐지?' 등의 생각을 곱씹으며 모든 정리를 마치니 나름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한 때 디지팩 앨범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료되어 퍼플 레코드에서 정체도 모를 아티스트의 앨범들을 가챠 돌리듯 사모으던 기억, 향 레코드에서 죽치고 있다가 마음에 드는 음악이 들릴 때면 점원에게 지금 나오는 음악이 어떤 음반에서 나오는 거냐고 물어보고 구매했던 추억 등이 떠올라 혼자 잠시 빠져있기도 했다.
요 근래 새로이 LP판과 CD 등의 피지컬 앨범들에 다시 꽂혀 들어본 결과 감상은 음질은 차치하고서라도 확실히 디지털 음원에 비해 집중도가 높다는 것이다. 디지털 음원 역시 애플뮤직이나 스포티파이 등의 앱에서 검색이라는 것을 해야 하고 최소한의 조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트는 수고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CD나 레코드판을 재생하는 데에 소요되는 번거로움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컬렉션을 뒤적이며 원하는 음반을 찾아서 열고 이미 세월의 흔적이 묻은 판에 조금이라도 더 흠집이 가해질까 조심조심 디스크를 꺼내서 재생기기 위에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거나 바늘을 내려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 조금 듣다가 대충 다른 음반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딴짓을 하기엔 이미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틀어놓은 음악에 강제로라도 집중하게 된다.
어릴 때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를 빌려오면 아무리 재미가 없는 작품이라도 다녀오는 길에 들인 노력이 억울해서 끝까지 다 보게 된 것처럼 LP판이나 CD도 마찬가지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름 거금을 들이고 아까운 시간을 빼서 구매한 음반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소 3~4번은 끝까지 들어보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앨범도 반복해서 들으면서 애정을 갖고 음악적 취향을 키우고 넓힐 수도 있었고 좋아했던 음반은 더욱 귀에 남게 된다. 괜찮은 음반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디지털로만 들었던 Korn의 최근 앨범에서 어떤 곡이 싱글컷되었는지 제목을 말하라면 한 번에 생각나지 않는 반면에 CD를 갖고 있는 그들의 초창기 앨범에선 싱글컷되지 않은 곡들의 제목까지 줄줄이 읊을 수 있다. Charlie XCX, Rina Sawayama, Billie Eilish 등의 음악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부끄럽게도 나의 심금을 울리는 팝송은 고등학교 때 친구의 CD를 빌려서 귀동냥하듯 들었던 Westlife, Backstreet Boys, NSync의 유치한 발라드 넘버들이다.
사실 나는 근래 10년 정도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음악을 듣는 것에만 집착했다. 현재 내 컴퓨터에는 대략 2만 곡 정도의 노래들이 디지털 음원의 형태로 존재하고, 그 곡들을 휴대하며 듣기 위해 사용하던 대용량 아이팟을 분실한 관계로 최근 발매된 음악들을 뒤처지지 않고 듣기 위해 애플뮤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많은 노래를 듣고 개중에는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 곡들도 많았지만 뭔가 예전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음악을 들으며 거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젠가부터 딴짓을 하기 위한 생활 BGM 용도로만 소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좋아했던 음반들, 좋아하지는 않았어도 내 수납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다시금 나를 주목해 달라고 부르짖는 앨범들을 꺼내서 하나씩 플레이어에 넣고 찬찬히 들어볼 생각이다. 기억에 강렬히 남은 음반들을 되새기며 다시금 추억하고 언제 이런 걸 샀지 싶은 앨범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보며 듣고 그 경험을 글로 써 내려가려고 한다. 이제 와서 그런 걸 해서 무엇하겠느냐 싶을 수도 있지만 좁은 컬렉션 안에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나에게도, 그것을 읽는 이에게도 나름의 재미와 의미가 있기를 바라며 '마이 피지컬 로맨스'의 서막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