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단 하나의 앨범만을 간직해야 한다면

Green Day - Dookie

by 핵보컬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연수를 위해 온 가족이 약 2년 동안 미국에 거주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살던 곳은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라는 도시였는데 주도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주의 다른 도시인 클리블랜드보다도 인지도 및 여러 면에서 밀리는 소박한 지역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게 교통 정보와 날씨 정보, 이따금 도로 위에 소가 드러눕는다거나 하는 게 메인 소식일 정도로 좋게 말하면 평화롭고, 나쁘게 말하자면 좀 지루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평화롭고 소박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다니던 초등학교의 친구들의 취향이 좀 뚜렷하고 남다른 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같은 반 급우들이 삼시세끼 밥보다 좋아하던 것은 스폰이나 베놈 같은 안티히어로가 등장하는 코믹스, 시끄러운 락 음악, 그리고 뚱뚱한 만화 고양이 가필드(갑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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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이 대체 뭘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반의 아이들이 늘상 건즈 앤 로지즈를 찬양하고 다녔는데, 학교 음악 시간에 틀기에는 노래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 대안으로 음악 선생님이 자주 틀어주던 노래가 바로 Green Day의 Basket Case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곡도 어린이들이 듣기에 가사가 건전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와 무관하게 어쨌든 당시에 이 노래는 한 번에 나의 귀를 사로잡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좋아하는 락음악의 디스토션 사운드를 가지면서도 뭔가 귀를 찌르는 샤우팅이 아닌 캐치하면서도 루즈한 분위기의 멜로디가 돋보였기에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꽤 오랜 시간 동안 Basket Case를 들을 수 있는 장소는 학교 음악실뿐이었다. 당시에 어린 나이에 자의로 CD를 골라서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집에 있는 내 음반은 알라딘과 라이온킹 OST가 거의 전부였으니, 난데없이 부모님을 졸라서 저속한(?) 락 음반을 사달라고 해서 '얘가 왜 이러지'하는 걱정을 끼치기보단 장난감이나 게임팩을 한 개라도 더 조르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한 동안 잊고 있다가 중학교에 올라갔을 무렵, 한 친구의 책상 위에 익숙한 CD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152813600_3933679956678147_3631177365177380711_n.jpg 음악보다 이런 게 더 중요하던 시절

앙증맞은 만화 그림으로 이루어진 앨범 커버 위에 눈에 확 띄는 'Dookie'라는 글자를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친구에게 "이거 네 거야?"라고 물었고 친구는 "왜? 좋아해? 원하면 빌려줄까?"라고 말하며 흔쾌히 내게 CD를 빌려주었다. 'Basket Case'는 좋아했지만 다른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CD를 재생했고, 이후에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강렬한 1번 트랙 'Burnout'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트랙 'F.O.D'까지 버릴 곡이 없이 모든 트랙이 너무 좋았는데, 당시에 내게 음반이란 가수가 싱글로 내세우는 트랙 한두개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진 공간이나 채우고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란 인식이 있었기에 '모든 노래가 좋은 앨범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에 꽤나 흥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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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day.png 가사집도 너무 귀엽다

가사집을 들여다보며 수 차례 CD를 반복재생하고, 약 1주일 정도 듣다가 친구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물론 컴퓨터에 mp3로 리핑해 두었기에 이후에도 계속 제트오디오와 윈앰프로 자주 듣곤 했던 것 같다. 끊임없이 듣고는 있었기에 딱히 피지컬 앨범을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가 몇 주 전에야 '헉, 나 이 앨범 안 갖고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어 LP판을 구매하게 되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해진 탓에 한 동안 듣지 않고 있었는데, 레코드판으로 오랜만에 다시 들어도 명반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번 트랙 Chump에서 4번 트랙 Longview로 바로 이어지는 깔끔한 트랜지션, 강렬함을 자랑하는 트랙 Welcome to Paradise, '가사의 whore는 왜 She가 아니고 He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젠 너무나도 유명해진 Basket Case를 지나 보통 앨범이라면 슬슬 힘이 빠질 듯한 시점에서 '뒷심이 약한 게 뭔데?'라고 내뱉은 후 내달리는 She, Sassafras Roots, When I Come Around로 이어지는 강렬한 킬링트랙의 3연타까지 이 앨범은 다시 들어도 완벽하다. 게다가 3주 만에 녹음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베이스 음과 깔끔한 멜로디, 신나게 질주하는 드럼과 기타 사운드는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고 세련된 풍성함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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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평행이론

게으르지만 유쾌한 고양이 가필드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것처럼, 느슨하며 어딘가 나사 빠진 것 같은 모양새의 세 명의 청년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이 앨범 역시 이제는 세대와 시간을 초월한 명반이 되었다. 게다가 지루하기 그지없는 시골 소도시 같았던 콜럼버스는 지금은 미국의 주요 락 페스티벌 중 하나가 열리고 Breaking Benjamin, Twenty One Pilots 등의 락스타를 배출한 곳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어쩌면 새로운 락의 부흥 현장에 내가 잠시 자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로 하여금 락을 사랑할 발판을 마련해 준 시작점이 된 음반, 평생 단 하나의 앨범만을 간직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Green Day의 Dookie를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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