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선님 사연] 그곳에서도 미술을 가르치고 계실까?

사연 제공 : 최종선

by 김작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칠판을 보쌈이라도 할 듯 어마어마한 크기로 적힌 선생님 이름이... 38년이 지난 지금껏 기억의 크기도 줄어들지 않은 걸 보니 선생님이 나에게 남긴 건 이름보다 더 큰 크기의 뭔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4학년 9반 담임으로의 자기소개를 마친 선생님은 뜬금없는 말씀으로 우리를 더 놀라게 했다.

“저는 전국 교사 실기능력 평가에서 미술 부문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여러분에게 앞으로 미술을 가르쳐 줄 겁니다.”


뭐지? 자랑인가? 그건 그렇고 시간표에 미술시간은 원래 있는데 왜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걸까? 아마도 미술시간에 좀 더 잘 가르쳐주신다는 의미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우리는 미술도구를 매일 들고 등교해야 했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만의 미술수업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선생님이 칠판에 붙은 전지에 붓으로 회화를 그리면 우리가 따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시간의 미술 수업이야 몰라도 매일 이어지는 미술 수업, 그것도 회화 위주의 수업은 미술에 관심 많은 특별 케이스가 아닌 이상 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결국 “선생님 저희 못 하겠어요! 미술 안 할래요!” 하고 분노를 꿈에서만 폭발하며 군 말없이 수업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분위기 상 선생님의 수업방식에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린 고난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찾아 붙드는 순교자의 정신으로, 지루한 미술시간에도 뭔가의 재미거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애들이니까. 우리가 찾은 재미는 이거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커다란 전지 위에 기막힌 솜씨로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


거기에 선을 그리는 법, 색을 쓰는 법, 색을 만드는 법 등에 대한 선생님의 자상한 지도까지 더해지면서 친구들의 미술 염증은 차츰 가라앉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미술을 제대로 배우려면 학원에 가야 했고 학원에 가려면 적어도 화가를 꿈꾸거나 그에 맞는 경제력을 갖춘 집안만 가능했다. 보통의 아이들은 잘 다녀봐야 태권도나 피아노, 둘 중 하나면 끝이었다. 그런 상황에 고급 진 미술수업을 매일 들을 수 있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행운이었다. 물론 50명이 넘는 친구들 중엔 정말 싫었을 친구도 있었겠지만.

때마침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도 미술광이어서 전폭적인 지원까지 뒷받침되었다. 각종 미술대회에 모든 학생이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고 상장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도 전국 규모의 미술대회는 유명 사립초등학교가 우승을 휩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국립인 우리 학교가 3년 연속 우승했을 정도니 말이다. 미술에 별다른 관심도 없던 나 또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빨강, 파랑, 노랑 물감만 있으면 원하는 색을 맘껏 만들어 쓸 정도의 실력을 키웠고 학교 대표까지 되어 많은 미술대회에서 상을 탔다.

KakaoTalk_20210329_185811477.jpg 친구들과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미술대회에 참가한 사진...가운데가 사연의 주인공.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은 잠시 잊고 지낼 즈음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종선아 그림 계속 그리고 있지?” 그분이라면 당연히 할 이야기인데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에 그 질문부터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고, 얼떨결에 나는 “예 선생님...” 하고 대답하곤 헤어졌다. 그리고 그게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몇 년 뒤 선생님은 골목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나는 그 소식을 어른이 된 뒤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미술과는 별 상관이 없다. 물론 광고기획자를 하면서 그림을 항상 접하긴 한다.

어린 시절의 그 일 년은 내 인생을 확 바꾸거나 엄청난 이익을 주진 않았다. 그냥 내 속에 있던 그림 그리는 재질을 잠시 일깨워준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매일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가면서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이 너무도 진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가르치는 일이 너무도 즐겁다.

KakaoTalk_20210329_185255577.jpg 지금 딱 한 장 남아있는 그림...

그때 선생님과 그렸던 수도 없이 많은 그림 중에 딱 한 장이 남아 있다. 뒤에는 선생님이 빨간 연필로 매겨놓은 점수와 도장도 그대로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꺼내 주셨다. 따로 보관해 두셨다고 한다. 외양간에서 소와 닭 여러 마리가 같이 노는 그림이다.

KakaoTalk_20210329_185257946.jpg 선생님의 글씨 '수',,,,참 잘 했어요는 거꾸로 찍으셨다 / 테이프 자국은 교실 뒤 게시판에 오래도록 전시된 흔적이다...

그림을 보니 그때 칠판에 크게 시원시원하게 붓을 휘두르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선생님이 보여주셨던 다정하신 모습, 늘 우리를 웃게 만들던 재미있던 말솜씨, 도시락을 못 싸오던 친구를 위해 본인 밥을 주시고 조용히 나갔다가 들어오시던 따뜻한 마음까지... 모든 기억이 좋기만 하다.


지금도 하늘에서 커다란 백지 위에 쓱쓱 그림을 그리실 거 같은, 그리고 여기 미술 배우실 분 없나요? 하며 싱긋 웃으실 것 같은 휘경초등학교 4학년 9반 강진욱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사랑합니다.

-최종선-


“넌 광고에 소질이 없어 보이니, 돈 낭비하지 말고 그만두는 게 어떻겠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전 오히려 그 말을 들었을 때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저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죠.

전 오기가 나서 학원을 계속 다녔고

아이러니하게도 전 지금까지도 광고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종선님의 그리움, 잘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김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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