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주년 5.18 전야제 참여기 5
이 날 광주는 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금남로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 수많은 인파가 있다고 생각하니, 08년 당시의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도로를 점거하고 우리의 요구 사항을 외쳤던 가슴 벅찬 흥분이 똑같이 일었기 때문이다. 80년 광주의 역사적인 공간에서 전야제는 시작되었다. 도청은 문화전당이란 것을 세운다고 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역사적인 공간을 볼 수 없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역사의 공간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다
518민중항쟁에서 도청은 주요 장소였다.
5월 21일엔 도청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가 있었다. 이 땐 저격수까지 투입되었다고 한다.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자국민을 향해 국민을 지키는 게 주요 임무인 국군이 발포를 한 것이다. 그것도 저격까지 해가며 사격을 했으니, 이건 대테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빗발치는 총탄 앞에 죽었다. 이 때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 모든 사람은 심정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아직도 진상 규명은 되지 않고 있다. 이 때 이후로 광주시민들도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엔 광주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시내에 퍼졌다고 한다. 시민군은 도청에 들어가 최후 항전을 준비한다.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는 새벽 4시 계엄군은 전남도청으로 향했고 교전 시간이 1시간이나 흘렀을까? 최후항전을 하던 수많은 시민군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이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청에 남았는지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남도청은 이런 역사적인 공간인데도 국립 아시아 문화전당을 짓는다며 철거할 위기에 놓였다. 이로써 전두환을 비호한 현실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우리가 광주에 갔을 때도 전남도청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이 언제든 과거를 지우려는 현실 때문이다.
전야제, 들끓는 감정으로 공동 기억을 남기다
전야제는 518인의 풍물패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거리 가득 북과 장구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소리는 심장소리를 닮았다고 했던가. 정말이지 마음 한 구석이 울리는 듯 했다. 가슴 한 가득 무언가 쌓인 것이 북소리의 울림에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나는 광주 사람들이 이런 가슴 뭉클한 공동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시내 한 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사물놀이의 소리는 온 광주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역사적인 체험이었고 이 한 판의 굿판이 광주 사람들의 힘이 되리라 믿었다.
광주민중항쟁을 판소리로 각색하여 불렀다. 판소리는 ‘계엄군이 물러간다. 광주시민 만세!’하는 부분에서 끝났다. 계엄군의 본부가 설치된 도청을 시민군이 되찾았을 때의 승리의 감격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만세!”라고 부르는 장면에선 내 몸마저 힘이 잔뜩 들어가 “만세!”를 외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패배와 실패의 역사이기에, 만세를 외치는 내 마음이 기쁠 수만은 없었다. 질 줄 뻔히 알면서 싸우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전야제는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오월의 환타지’라는 오케스트라의 합주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을 듣는데,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정말이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는 구절을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되더라.
5.18의 정신, 그건 여전한 숙제다
알고 있다, 우린 오월항쟁에, 광주에 빚진 자들이다. 오늘날 어느 정도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그건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2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세상이었는지 회의적이다. 일시적으로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물러나자 광주는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계엄군이 모든 도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광주로는 사람이든 물자든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즉, 치안부재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광주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 그 상황을 역이용하여 상점이나 은행을 털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없는 살림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줬으며, 헌혈을 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살렸다고 한다.
바로 광주민중항쟁이 32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서로를 짓밟고 일어서야만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잘 사는 사람이 못 사는 사람을 돕는 사회가 아니라 각 자가 할 수 있는 만큼 함께 도우며 어우러지는 사회를 요구했던 게 아닐까.
광주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역사의 장 속에 씁쓸한 현실
전야제의 열기가 뜨겁던 금남로의 거리에 씁쓸한 현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두 장면을 볼 텐데 이걸 씁쓸하다고 할지, 당연하다고 할지는 각자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1. 금남로 바로 옆엔 SK 텔레콤 대리점이 있다. 이 날은 기아와 삼성의 경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SK 텔레콤의 큰 티비에선 계속해서 경기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전야제를 시작하기 전엔 야구 소리에 리허설하는 소리가 묻힐 정도였는데, 그나마 전야제가 시작되자 야구소리는 사라졌다. 하지만 전야제 내내 티비는 계속 켜져 있고 경기 장면은 계속 해서 나오고 있었다. 전야제를 보러 온 사람들 중 몇 명은 그 티비 앞에 붙어 경기 장면을 봤다. 오월 항쟁을 같이 기린다면, 모두 상점문을 닫고 동참했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물론 대리점에선 할 얘기가 있을 거다. 아마도 ‘광주 소재 야구단이 나오는 경기인데, 사람들에게 알권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것뿐인데’라는 이야기를 할 게 뻔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뻔한 거짓말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리점을 알리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니.
2. 금남로 왼쪽엔 학원이 있는 건물이 있다. 전야제 소리는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컸다. 당연히 오늘 같은 날은 학원 강의도 없을 줄 알았다.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강의를 도저히 진행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음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학원에선 강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더라. 난 왜 그리도 그런 장면들이 씁쓸하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역사적인 광경을 같이 봐야 한다는, 같은 공감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목차
오월항쟁 없이 나를 사유하기 있기? 없기?
사람 찾아 떠난 광주에서 역사를 만나다
518번 버스를 타고 광주를 여행하다
같은 장소 속에 다른 느낌이 숨어 있다
오월묘지 상징탑에 의미 새기기
신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
사연이 묻힌 오월묘지
감수성, 소통의 기본 조건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안타까운 죽음, 그럼에도 묻히지도 못하는 현실
역사에 치여 사는 개인,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사연이 묻힌 구오월묘지
꾸며질 때, 과거는 사라진다
현재를 살려는 자, 이 비를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역사의 공간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라지다
전야제, 들끓는 감정으로 공동 기억을 남기다
5.18의 정신, 그건 여전한 숙제다
역사의 장 속에 씁쓸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