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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5. 2017

무엇을 상상했든 최악의 하루

2009년 국토종단 10 -  4월 23일(목)

새벽기도에 참여해야 하기에 일찍 일어났음에도 몸은 활기찼고, 목사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니 맘은 가벼웠으며,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 배는 불렀다. 이 기분 그대로 오늘은 참 즐거운 여행이 될 것만 같다.           


▲ 밥도 배불리 먹었고, 오랜만에 사람의 정도 듬뿍 맛봤다. 고로 이제 신나게 출발하면 된다.



     

짧은 거리가 길어진 사연 

    

아침에 가는 길은 익숙한 길이다. 교생실습 때 매번 다녔던 길로 중학교 아이들과 나름 친해져서 함께 재잘거리며 등하교를 했기 때문이다. 이 길이야말로 빠르게만 변해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하나도 바뀐 게 없는 길이었다. 일반도로라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한적했고, 3년 전의 감흥이 그대로 느껴져 정말 좋았다. 더욱이 어제 국도를 거닐며 한껏 힘들어했던 탓인지 한적한 길을 걷는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던 것 같다. 

신림중학교까지는 가던 식으로 가면 됐고, 그 다음부턴 가본 적이 없으니 지도를 계속 살펴보며 걸었다. 708번 지방도를 타야 하기에 그곳이 어디인지 놓치지 않으려 계속 직진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708번 지방도가 나왔고, ‘역시 맞게 잘 왔구나’라는 안도감으로 걷기 시작했다. 계속 가다 보니, 저 멀리 호수 같은 게 보이더라. 지도엔 호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불안하긴 했다. 그럼에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눈앞에 보이는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쉬고 일어나 좀 더 걷다 보니, 4차선의 국도가 보이더라. 그걸 보는 순간 아까 전까지 들었던 의심은 확 걷히고, ‘저기야말로 1번 국도구나’라고 쾌재를 불렀다. 이미 시간은 12시가 넘어가고 있었기에, 저 도로를 타고 걷다가 첫 번째로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부터 지도를 보며 ‘708 도로를 따라 가다가 1번 국도를 타고 정읍에 간다’는 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터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 별표시가 되어 있는 곳이 교회이니, 위와 같은 경로로 가서 1번 국도에 안착했을 거라 상상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4차선 국도에 올라서서 이정표를 보니 여전히 23번 국도라지 않은가? 하지만 그 순간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이고 잘못 됐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분명히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도 ‘내가 22번 국도에 있다(흥덕 부근이라 생각했음)’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걷다보니 어제 신림교회로 향하는 길에서 봤던 건물이 다시 나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우리나라 건물이 무개성적으로 천편일률적이라 해도 그건 단순히 비슷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똑같았으니 문제였다. 허걱! 그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나는 708 국도를 타긴 했지만,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708을 따라 남하하여 신림저수지를 지나고 다시 23번 국도로 가게 된 것이다. 모든 게 명확해지는 순간 ‘온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라는 노래가사처럼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어졌다. 오전 내내 걸은 모든 게 헛수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황당한 이유로 정읍까지 가는 길은 엄청 길어졌다.             



▲ 그런데 실제론 북쪽으로 가야 할 것을 남쪽으로 향하는 바람에 한 바퀴 도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으아아악~~~~



   

내 생각과 같지 않을 때 좌절하지 않으려면 

    

더 이상 걷고 싶은 마음도,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도 모두 사라졌다. 어젠 국도에 된통 ‘당하고’ 오늘은 지방도에 된통 ‘당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지도 보는 게 서툴고 이제 초보 여행자다보니 당연한 실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같은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는 건 ‘죽기보다도 싫은’ 거였다.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커서 이대로 도보여행을 그만 둘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양발의 복숭아뼈가 찔리듯 아팠다. 그래서 빨리 걸을 수도 없었고 절뚝절뚝거리며 걸어야만 했다. ‘여행한 지 4일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이러면 나중엔 아예 못 걷게 되는 거 아냐?’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걷는 것 자체는 좋은데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땅을 디딜 때마다 찌릿찌릿 통증이 오고 복숭아뼈 있는 곳은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프기까지 하니, 이래저래 참 힘이 들더라. 



▲ 오전에 갈 때만해도 이렇게 힘차게 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23번 국도에 올라 얼마 걷지 않으니, 역시나 신림교회가 저 멀리 보인다. 이미 그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순간 한숨부터 나왔다.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나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넣으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어제 걸었던 이 길은 목적지를 눈앞에 둔 ‘기쁨과 환희의 길’이었지만, 지금 걷는 이 길은 헛수고를 감내하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저주와 비관의 길’이었으니 말이다. 해가 중천에 떠있어서 도로는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몸도 오전에 비하면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그 때 잠시 ‘아! 그냥 오늘도 신림교회에서 하루 더 머물까?’라는 생각까지 들더라.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했겠냐 만은 그땐 그랬다. 정말이지 같은 길을 다시 걷고 싶은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무튼 그 때부터 주저리주저리 혼잣말로 내 자신을 타이르며 그런 잡념들을 떼쳐내려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선 군대의 명언인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적격이다. 진정한 여행은 이런 극도의 상황(?)에 몰렸을 때 주저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며 그런 중에도 여유를 찾아야 하는 걸 테다. 모든 일에 일장일단이 있다고 ‘+’와 ‘-’가 늘 함께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일엔 어떤 ‘+’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걸어야만 한다. 그렇게 맘먹었는데도 걷다가 지칠 때면 ‘아까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은 어디쯤일 텐데...’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라. 그건 나의 이성이 아닌 몸이 보내는 자연스런 후회였다. 그래서 사람은 어쩔 수 없나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막상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의 행동은 이렇게도 다르니 말이다. 그런 후회들이 부질없다는 걸 알고 그런 실수를 통해 지도 보는 법도 익혔으며 걷는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걸 아는 데도 그런 건 다 묻히고 낭비된 시간만 머리에 남아있었다. 

이런 상황을 통해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예측치 못한 상황들을 많이 경험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는 것 자체가 언제나 예측치 못한 상황에 내던져지는 것인데 아직도 ‘모든 게 내 생각만 같기를...’하는 바람만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지금은 그냥 죽을 맛이다. 신도 안 나고, 하고픈 맘도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잠자리 구하기 실패와 여인숙의 꺼림칙한 경험

     

원랜 점심을 식당에 들어가 제대로 먹을 생각이었는데, 오전의 실수로 입맛마저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걷는 길에 찐빵집이 보이자, 그걸로 점심을 대신하기로 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온 터라 그 정도로도 진수성찬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후엔 걸음걸이에 그다지 감흥이 실리지 않더라. 마지못해 행군하는 군인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떼었다. 더욱이 4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더라. 생각조차 멈춰버린, 그래서 맹목적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엔 나도 없었고 풍경도 없었다. 



▲ 그렇게 고창은 행복하게 들어와서 슬프게도 헤어져야 했던 고장이 되었다. 제2의 고향 고창이여 안녕~



어제 교회에서 신세를 지고 나니까 여관에서 자는 게 이래저래 최악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여행의 의미가 반감되기도 하고 돈도 깨지며 잠도 깊게 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마을회관에서 잘 수 있도록 시도 해보려 한다. 5시전까지는 마을회관이 꽤 보였다. 하지만 정읍에도 도착하지 않았고 시간도 많이 남아서 그냥 걸었던 거다. 하지만 막상 5시가 넘어 찾으려 하니 마을회관도 교회도 보이지 않더라. 이게 뭐니? 꼭 맘먹고 찾으려 하면 나오지 않는단 말이지. 평소엔 택시도 흔하다가 막상 잡으려 하면 택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는 수없이 꾹 참고 걸었다. 걷다보니 어느덧 정읍 시내에 도착하더라. 보이는 교회는 모조리 들렸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건 뭐 약속이나 한 듯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머피의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는 날인 건가? 

한참을 걸어 시내 쪽에 진입하니 여인숙이 보이더라. 지금껏 지나온 마을엔 여관만 있던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여인숙을 봤다. 무안에 갔을 때 여인숙이 싸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바로 들어갔다. 20,000원을 불렀고 18,000원으로 깎았다. 그 때 쾌재를 불렀다. 왠지 돈을 번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을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계산부터 한 것은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다. 방엔 창문도 없이 커튼이 쳐져 있었고 장판과 도배지는 누리끼리한 게 폐가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여기 저기 곰팡이 선 냄새가 진동했다. 방엔 티비 한 대와 침대 하나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망가진 티비는 켜지지도 않았으며, 침대는 나무를 덧대어 골격만 갖추고 오래된 매트를 얹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 위에 전기장판이 놓여 있는데 습기에 오래 노출된 장판에선 칙칙한 냄새가 날 정도였다. 과연 켜지기는 할까? 그 위엔 요와 이불이 놓여 있는데 과연 여기서 묵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른 여관에서는 이렇게까지 찝찝한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는데, 여긴 방의 꺼림칙한 기운 탓인지 있는 것조차 불편하게 느껴졌다. 



▲ 나에게 여인숙이 뭔지 제대로 알려준 곳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뜨거운 물이라도 콸콸 나와 몸이라도 개운하게 씻을 수 있다면 방이 어떻든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주인집 세면장을 같이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들어갔다. 욕실도 어쩜 그리 허술하게 생겼던지. 내 눈이 여행을 하면서 너무 높아진 건가? 뜨거운 물이 잘 나오길 기대하며 수도꼭지를 열었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는가 싶더니 곧 차가워지더라. 이게 뭥미? 그래서 결국 족욕도 못하고 양말만 차가운 물에 빨고 대충 씻고 나와야 했다. 이로써 하나 깨달았다. 싼 게 비지떡이다~ 호강하려고 여행한 게 아닌 이상, 이런 경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오늘 이래저래 힘들었던 만큼 푹 쉴 수 있길 바랐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오늘은 깊이 자긴 글렀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하니 나에게 자장가라도 불러줘야겠다. 그리고 정읍으로 오는 도중에 지도까지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래서 기분 참 이래저래 ‘거시기’하다. 아침엔 기분이 최상이었는데, 낮부터 급전직하하다가 밤엔 완전히 넋다운 되었다. 이래서 인생은 모르는 거다.


(찐빵 2.000원, 저녁 4.000원, 여인숙 18.000원 / 총합 24.000원)



▲ 너무 그 상황이 기가 막혀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래서 비슷한 느낌의 사진으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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