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11 - 4월 24일(금)
지금까진 여관에서 이틀을 자고 그젠 집처럼 편안한 교육관에서 잤다. 교육관이야 3년 전에 한 달 정도 생활하던 곳이니 불편할 이유는 없었지만, 여관은 아무래도 낯선 곳이라는 느낌 때문에 푹 잘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여인숙에서 자보니, 여관은 그나마 천국이었다는 것을 알겠더라. 곰팡이 낀 벽지들, 창문도 없이 날림으로 지어진 건물, 나무로 대충 틀을 만들어 비치해놓은 침대와 그 위에 얹힌 언제 빨았을지 모를 이불과 전기장판, 켜지지 않는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는 티비까지 모든 게 잠을 자기엔 최악의 장소였던 거다. 그러니 나도 밖에서 노숙을 한다는 생각으로 우의까지 완벽하게 껴입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마음으로 누운 만큼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불평불만조차도 지금처럼 그나마 자고 난 후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일 뿐이다. 어제 저녁에 이곳에 자리를 꾸렸을 때만 해도 가까운 길을 헤매고 헤매 돌고 돌아온 탓에 힘도 빠지고 의욕도 사라져 그저 쉬고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는 곳을 잘 고르고 말 것도 없이, 그저 보이는 곳에 들어가 빨리 잘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그런 마음일 때 한 번 정도는 잠을 자고 싶었던 여인숙이 눈에 보인 것이니, 사막에서 신기루라도 찾은 마냥 달려든 것이다. 그땐 당연히 ‘군대에서도 훈련을 할 때 야간에 길가에서 그냥 침낭만 두르고서도 잠을 잤었는데, 방에 들어가는데 자지 못할 리가 있겠어?’라는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건 한 편으론 자신감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뭐든 괜찮다는 식의 자포자기하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가격을 조금 더 깎은 후에 바로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자신감과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문제였음을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잘 수 있는 곳이 필요한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는 곳이 필요한 것이니 말이다. 넉넉한 돈으로 여행을 하는 게 아니어서 어떻게든 아껴야겠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그래도 나름 질적으로 잘 갖춰가며 하는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역시 경험만큼 나를 즉각적으로 바꾸는 것도 없다. 아~ 오늘은 32km를 걸어야 해서 꽤 많이 걸어야 하는데, 아주 고생하게 생겼다.
오늘부터 비가 온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일기예보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무래도 계속 바깥에서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전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나,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이 일기예보를 자주 본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남의 일처럼만 여겼다. 그들에겐 하루하루의 기상 상태가 일을 하는데 매우 중요하기에 그런 것인데, 그런 마음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막상 내가 그런 처지에 있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더라.
월요일에 경험했던 대로 배낭의 방수커버 만으로는 비를 막고 짐이 젖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짐들을 하나하나 빼서 비닐로 꽁꽁 싸뒀다.
준비도 되었겠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인숙을 나가고 싶겠다 바로 출발했다.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 아직 비는 내리지 않기에 우의는 입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얼마나 걸었을까 비가 한 방울씩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다시 여인숙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가 우의를 챙겨 입었다. 아직 비는 제대로 내리는 건 아니었기에 그렇게까지 챙겨 입을 필욘 없었지만, 아무래도 계속 비 내리는 것을 보고 우의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기보다는 아예 입고 다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어느덧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정읍은 역 주변이 나름 변화한 곳이었기 때문에 바로 편의점이 보이더라. 그곳에서 김밥과 라면을 먹었다. 라면과 김밥은 임용을 준비하던 때에 나에게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특별식이었다. 늘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그게 물릴 때쯤 거금 2500원 정도를 지출하여 만찬을 했던 것이다. 왕뚜껑 짬뽕과 김밥을 함께 사서 먹고 있노라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곤 했었다. 지금이라 해서 달라진 건 없으니, 아침식사치고는 만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호사를 누려본다.
비는 조금씩 오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다. 우의는 통풍이 잘 되지 않을뿐더러, 보온 효과까지 있으니 한결 더 덥게 눅눅하며 찝찝하게 느껴지더라. 월요일에 빗길 여행 때 느껴지는 상쾌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그런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비가 내리기도 전부터 너무 빨리 대처를 했더니, 그게 나에겐 비수가 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우의를 벗기에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래도 머지않아 비가 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덥더라도 그냥 입고 걸어가는 것으로 했다.
정읍에서 김제로 가는 길은 지방도 701을 타고 가다가 국도 30번으로, 다시 29번을 타고 들어가는 루트를 택했다. 오늘 루트엔 김제평야를 가로 질러 가는 길이 포함되어 있다.
남한 최대의 평야라던 ‘김제평야’는 한국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곳이다. 곡식 생산량이 많으면 자연히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 곡식들은 조선시대엔 지주들에게, 일제시대엔 일본인에게 빼앗기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는 빌미가 됐을 뿐이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언제나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굶주리며 근근이 살아왔다.
더욱이 한여름의 햇볕은 벼들이 익기엔 최적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괴로움이었다. 해를 피할 수도 없는 논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불볕더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니기럴, 조상 대대로 여그서 산 것이 웬수여. 나라 안 뺐갰을 때넌 온갖 잡세로 주리 틀리고, 왜놈덜 시상이 된게로 그놈덜이 질로 먼첨 치고 들어 난장판얼 지기고, 땅만 넓었제 실속언 하나또 없어 고상만 곱쟁이로 한당게.
『아리랑』, 조정래, 해냄출판사, 2011년, 4권 22쪽
『아리랑』은 김제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에 어떻게 반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목포의 발전도 그러하듯 군산의 발전도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민초들이 어떤 수모를 겪으며 어떻게 살아가야만 했는지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국토종단 정확히 1년 후엔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인 벌교에 갔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개간된 땅들, 그리고 벌교초등학교에서 숨져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랑』에선 일제에 짓밟힌 우리 민족의 서글픔에 대해, 『태백산맥』에선 이념의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민족의 아픔에 대해 조정래 작가는 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지나는 길이 일제강점기엔 그와 같은 수탈의 현장이었고, 경제발전기엔 이촌향도로 인해 도시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양분일 뿐이었다. 그와 같은 울분과 원한이 가득 찬 ‘땅만 넓어제 실속언 하나또 없’는 공간을 나는 걸어서 지나가야 한다.
701 지방도는 2차선으로 되어 있고 차들도 많이 다니지 않아 도보여행을 하기에 최적이었다. 모든 노선이 2차선이라 쾌적했다. 이 도로는 호남선 철도와 가까워질 듯 멀어질 듯 마주 보며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 이 길을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주 지나다니는 기차를 볼 수 있다.
걷는 내내 KTX가 정말 많이 지나가더라. 아직 KTX를 타본 적은 없지만, KTX는 이동수단의 속도 혁명을 낳았다. 기차 여행엔 나름대로의 낭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전주에 살던 사람들은 밤 기차를 타고 전라선을 따라 여수에 가본 기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처음 열차가 등장했을 땐 열차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육중한 철덩어리가 움직이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신식 기술 문명을 예찬하던 사람들, 기차의 굉음에 땅에 묻힌 조상의 혼들이 경기를 일으킨다며 거부를 하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열차가 등장한지 100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열차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라졌지만(오히려 자기 지역에 열차역이 생기기를 바라는 시대가 되었으니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교통의 편함은 곧 집값, 땅값을 상승시키기 때문), 열차에 대한 경이로움은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도혁명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한 번 정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수레나 마차, 역마 등 이전의 수송 수단에서 매주 중요한 고리였던 ‘사이공간’이 기차 수송에서는 사라졌다. 기차는 단지 출발과 목적만 안다. ……사이공간이 소멸된다는 건 인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감각적 네트워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 여행기(열하일기)가 특별했던 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공간에 의해서다.
『나비와 전사』, 고미숙 저, 휴머니스트, 2006년, 53쪽
기차는 완벽하게 출발점과 도착점만 남긴다. 지나는 과정 속에 마주치고 섞여야할 많은 것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정은 사라지고 완벽한 결과만 남게 된다. 빠른만큼 우린 과정의 소중함, 마주침의 행복함은 잃어버리게 됐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도보여행을 하게 됐다. 과정을 보기 위해, 마주쳐 보기 위해서 말이다. 무수한 사이공간이 연암에겐 『열하일기』라는 선물을 낳았듯이, 이런 과정들이 나에게도 『2009년 국토종단기』로 남을 것이다(이에 대해선 2015년에 떠난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기’에서 좀 더 자세하게 풀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