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an 15. 2017

고창신림교회에서 맞이한 아침

2009년 국토종단 9 -  4월 23일(목)

고창 신림교회에서 정읍까지는 20km 약간 넘는 거리다. 어제와 그제 30km가 넘는 거리를 무리하며 걸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좀 여유롭게 걸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정읍을 오늘의 목적지로 정하였다. 

그런데 웃긴 점은 30km를 걸었다는 점이다. 길을 만드는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길을 늘릴 수 있었던 걸까?               



▲ 오늘은 즐기며 갈 생각이다. 국도가 아닌 일반도를 따라 걸으려 한다.




국토종단 속 또 하나의 도전 

    

정읍까진 고작 5~6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빨리 걸을 것이 아니라, 그저 천천히 걸으며 주위의 것들을 맘껏 보고 느껴볼 생각이었다. 

어제 23번 국도를 타며 잘 정비된 국도는 도보 여행자에겐 최악의 도보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오늘은 국도가 아닌 지방도나 일반도를 따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로 도보여행을 시작한지 4일째가 되어 가지만, 지금까진 이정표가 확실히 되어 있어 길을 헤맬 필요가 없는 구도만을 따라 왔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도와 현실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젠 이정표가 확실히 되어 있지 않지만 마을을 지나고 사람들 곁을 지나는 길을 따라 걸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도전이기에 바짝 긴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도를 손에 들고 수시로 체크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그간 3일 동안의 여행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편하고 별다른 고민이 없던 여행이었는지를 알만하다. 국도의 번호만 알고 있으면 그걸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고, 그에 따라 지도는 그렇게까지 펼쳐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보여행도 도전 그 자체이지만, 전혀 낯선 길을 가는 ‘도전 속의 도전’을 또 하려 하고 있는 셈이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거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교육관에서 일어나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 빨갛게 표시된 루트로 걸을 생각이다. 일반도를 따라 가다가 708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1번 국도로 접어드는 경로다.




새벽기도 후에 자는 잠은 꿀맛  

   

그래서 3년 전에 여기서 뒹굴었던 곳이라는 안심이 되기 때문인지, 여관에서 잘 때보다 훨씬 편하게 깊게 잘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역시 새벽 5시 기도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건 부담이 되긴 하더라. 물론 목사님이 기도회에 참여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게 자게 해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니 말이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두 시간 정도 더 잤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짤막하게 자는 잠이 더 꿀맛이긴 하다. 군대에서 중간 타임에 불침번을 선 후에 2~3시간 정도 잘 시간이 남아 있을 때가 제일로 행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 어려오기도 하고, 이제 무거운 짐을 털고 잠을 잘 수 있다는 행복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때 바로 자는 건 새벽근무(?)를 한 나를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새벽의 공기를 맘껏 마시며 뽀글이를 만들어 천천히 라면의 참맛을 음미한 다음에 자줘야, 그게 바로 군생활의 꿀맛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날 뽀글이를 해먹은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군대에서 느껴봤을 법한 새벽시간의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 내가 군대에 있을 땐 스파게티가 최고의 라면이었다. 조금만 PX에 늦게 가도 품절되는 바로 그런 것.



      

따뜻한 아침푸근한 정감

     

2시간을 잔 후에 일어나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유가 있는 날이기에 늦게 떠나도 되지만, 아무래도 교회에 신세를 지고 있는 이상 8시가 되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천길영 목사님이 아침을 먹자고 부르시더라. 그래서 오랜만에 사택에 들어가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까진 아침을 대충 때우는 식으로 다녔었다. 그래서 김밥을 사서 육포와 함께 먹는다거나 아침은 굶고 점심을 거하게 먹을 생각으로 그냥 간다거나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모처럼만에 아침을 든든히 먹을 수 있고, 모처럼 사람의 온기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로 좋아지더라. 

그러고 보면 교생실습을 할 때에도 어쩌다 사택에 들어가 차를 마시기도 하고, 밥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목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먹는데, 참 단란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물씬 들긴 했었다. 



▲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이건 2013년도 사진이란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사진출처-전북언론문화원)



목사님에겐 딸 둘이 있다. 13살인 천사라와 11살인 천린이가 그들이다. 천사라는 우월한 외모에 깍쟁이 같은 느낌이 있는 아이이고, 천린이는 귀엽고 깜찍하여 3년 전에도 여러 사람들의 예쁨을 홀로 누렸던 아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이 되었고, 그에 따라 말괄량이에서 부끄럼을 타는 아이로 바뀌었다. 확실히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이렇게 훌쩍 커버리는 아이들을 볼 때 여실히 느껴진다. 오랜만에 봐서인지 처음엔 매우 어색해하며 곁에도 오지 않더니, 이날 아침엔 나름 적응이 됐던지 편하게 대해주더라. 나도 반가워서 활짝 웃어줬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목사님도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하는 내가 참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3년 전의 패기어린 모습처럼 곧바로 교사가 되어 당당하고 떳떳하게 보러 올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게 아닌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온 것이니 황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솔직히 나는 이런 모습으로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됐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당당히 내보일 수 있던 순간일 테니 말이다. 어찌 보면 도보여행은 나 자신을 거부하던 과거를 버리고, 나 자신을 끌어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