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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9. 2017

도보여행과 공부의 공통점

2009년 국토종단 17 -  4월 27일(월)

여느 교회나 새벽 4시나 5시엔 새벽기도라는 걸 한다. 예전에 교회에 다닐 땐 부활절, 작심 새벽기도회와 같은 특별한 날에만 새벽기도를 나갔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참가하려면 일찍 일어나야만 하고, 그러려면 생활리듬이 깨지기 때문이다.                



▲ 2주차 여행은 시작부터 예기치 않은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조으다~




새벽을 깨우리라

     

2003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거의 반년 동안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근무시간은 특이하게도 아침 6시~9시까지 근무 후 잠시 퇴근 후에, 다시 돌아와 오후 6~10시까지 마무리 짓고 퇴근하는 거였다. 그런 근무 형태다 보니 10시에 퇴근하고 나면 집에 와서 바로 잠을 자야만 했다. 새벽 5시에는 일어나 준비를 해야지만 겨우 시간 내에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전 근무를 마치고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9시간이 남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그 시간엔 잠을 자고 시간을 때우다 출근하는 게 다반사였다. 결국 이래저래 하루를 온통 아르바이트에 쏟아 붓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때 느꼈다. 몇 시간 근무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근무형태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은 일상의 리듬을 깨버린다는 것을. 



▲ 헬스장 아르바이트는 힘들진 않았다. 단지 근무 시간이 문제였을 뿐.



그럼에도 도보여행 중엔 교회에서 잠을 자게 되면 꼭 새벽기도에는 참석하겠다는 철칙을 정했다. 교회에서 자게 된 건 고창 신림교회와 지금 묵고 있는 함열성결교회 뿐이지만, 이런 철칙은 처음부터 정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건 새벽기도를 하여 하루를 신심 가득하게 시작하자는 이유가 아니라, 그저 잠자리를 제공해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작은 교회일수록 새벽기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나름 힘이 된다고도 믿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던 중에 갑자기 나를 보더니 여행의 계기와 목적지를 물어보셨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이번 여행 자체가 나에겐 강고한 틀을 깨는 계기이기 때문에 강하게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떠나게 됐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철원’이라고 밝혔다. 아마 아침부터 강한 어조로 말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많은 분들은 ‘뭘 저리 힘줘서 말을 하지’라며 깜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목사님은 건강하게 여행을 잘 마치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후에 잠깐 동안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이 교회는 나름 큰 교회다보니, 새벽기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오더라. 이분들은 ‘새벽을 깨우리라’는 생각으로 신앙심을 불태우고 있는 거였다. 이분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들이 진정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목청껏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나도 가만히 있기는 뭐 해서 대학과 중용 서문을 기도하는 말투로 외웠다. 몸은 미치도록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던 시간이다.                



▲ 목포→무안→함평→고창→김제→익산→논산→연기→청원→진천→이천→여주→양평→포천→연천→철원




걷는 사람에겐 발이 가장 중요하다

     

전도사님과 숙소로 돌아와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 누웠다. 몇 분을 누웠을까? 그래도 쉬이 잠이 오지 않아 교회 화장실에서 씻고 어제 남은 밑반찬 몇 가지와 함께 밥을 먹었다. 잠도 자고 아침도 먹었겠다 이제 준비를 하고 떠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짐을 챙기고 나가려던 찰라 발바닥이 찌릿찌릿 아프더라. 그래서 양말을 벗어 확인해보니 물집이 잡힌 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어제 오후엔 거의 전속력으로 질주하다시피 걸었으니, 발바닥이 멀쩡할 수는 없었던 거다. 어제 충분히 무리를 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할 겸 실에 바늘을 꿰어 물집 사이로 통과하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괜찮을 줄만 알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고, 나에겐 자나 깨나 물집 관리라 할 수 있다. 그게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이상하게 앞쪽에만 물집이 생겼다.




빠르지 않게조바심 내지 않게천천히꾸준히

     

느긋한 마음으로 8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응급치료가 제대로 안 된 탓인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찌릿한 아픔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온다. 그러니 온 신경이 곤두서고 되도록 물집이 잡히지 않은 부분으로 땅을 디디려 하다 보니, 걸음걸이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조금만 걷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계속 그렇게 걸으려 하다 보니 온 몸에 무리가 왔다. 발바닥이 아프게 되니 걸음걸이가 틀어지고, 걸음걸이가 틀어지니 골반과 허리까지 아파온다. 몸은 역시나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중요하지 않은 곳도 없는 완벽한 균형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걷는 게 아주 쉬운 일 같아도 거기엔 꽤나 과학적인 운동원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삼박자 보행을 하지 않아도, 뭔가 부자연스럽게 걸어도 온 몸의 균형이 망가져 버린다.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척추를 곧추세우고, 삼박자 보행을 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걸 안다 해도 지금 상황에선 물집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쉽지가 않았다. 물집이 발바닥 앞 쪽 부근에 있기에 거기가 땅바닥에 닿지 않도록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느릿느릿 걸어야만 했다. 역시 어제 무리한 만큼 오늘 타격을 받는 건 어찌 보면 삶의 순리일지도 모른다. 



▲ 삼박자 보행을 하지 않으면 곧바로 허리에 무리가 오더라. 장거리 도보여행엔 삼박자 보행이 필수다.



『순오지』란 속담책엔 ‘삼일 가야할 길을 하루에 가고 열흘 눕는다(三日之程, 一日往; 十日臥.).’라는 속담이 나온다. 어찌 보면 과욕이 부른 참상을 제대로 보여준 속담이라 할 수 있고, 바로 어제의 나를 향해 말해주는 속담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목표에 어떻게든 빨리 닿기를, 쉽게 닿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세상엔 ‘속성’이 판을 치며, 오히려 진득하게 해나가는 사람을 바보라고 여긴다. 하지만 속성으로 이룬 쾌거는 모래로 쌓은 성 같은 것일 뿐이다. 그건 실질적으로 나에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오늘의 나처럼 오히려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문학원에서 강사로 몇 개월 간 일을 했었다. 한자능력시험이 아이들에겐 따놓으면 요긴한 것이 되다 보니, 초등학생들이 학원에 많이 찾아왔다. 한자능력시험은 분기별로 있는데, 이럴 때마다 아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상위 등급의 자격증을 따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면 강사는 아이들이 외워야 할 양을 정해주고 그걸 때에 따라 체크해주는 것이다. 즉,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외우고 확인 받고, 그걸 토대로 시험 문제를 풀어보고 다시 확인 받아 점수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정말 3개월 만에 6급의 자격증을 딴 아이가 5급의 자격증을 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급하게 먹은 밥은 소화가 되지 않아 체하게 하고, 한 번에 부린 과욕은 나를 짓누르듯이, 3개월 만에 딴 자격증은 그저 종이떼기일뿐이다. 자격증을 따는 순간부터 5급 한자는 서서히 까먹어 가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러니 자격증은 땄지만, 5급 한자는 모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어제 무리한 도보여행 일정으로 오늘 힘들어 하는 상황이나, 학원에서의 그와 같은 경험이나 알려주는 바는 명확하다. 공부든 여행이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서서히 해나가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되며, 너무도 지지부진하여 조바심이 든다해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여행이든 공부든 진정한 내 것이 되고 ‘힘겹고 짜증나는 것’이 아닌 ‘즐겁고 유쾌한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경험으로 익힌 여행과 공부의 공통점이다.     



 

▲ 위 속담과 같은 글이 [논어]에서도 나온다. '빠르게 하려하면 오히려 도달할 수 없게 된다(欲速則不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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