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토종단 18 - 4월 27일(월)
가는 길에 후배를 만나서 어제 잘 지냈고 이제 다시 여행을 떠난다고, 자못 비장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출근 준비로 한참 바쁠 텐데도 오랜만에 선배답지 않은 선배가 찾아왔다고 인사를 받아주는 후배가 정말로 고맙더라. 더욱이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식당에 올라가 커피까지 타서 내려오는 그 센스는 정말로 최고였다. 이제 짧은 만남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홀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어제 2주차 도보여행을 시작하면서 너무 무리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도 만났고 오랜만에 사람의 정을 맘껏 느낄 수 있었지만, 그만큼 후유증도 큰 게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혀 욕심 내지 않고 논산까지만 걸어서 갈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은 724 지방도를 따라서 가다가 781 지방도로 옮겨 타고 가다가 23번 국도로 논산까지만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후배가 경로를 확인하더니 그 길로 가면 쭉 돌아서 가는 거라며,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주더라. 그렇지 않아도 후배가 알려준 길을 지도로 보긴 했는데, 어떤 도로명도 붙어 있지 않아서 함부로 갔다가 헤맬까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후배가 상세히 길을 알려주며 쭉 따라 가면 된다고 연거푸 얘기를 하니, 그 말마따나 한 번 가볼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역시나 그 길은 이차로로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주변에 논만 있어서 한적한 기분으로 걷기에 좋았다. 어제와는 달리 가는 길 도중 도중에 화창한 날씨를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
그런데 문제는 저번 고창에서처럼 또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후배는 여러 번 “쭉 따라가다가 좌회전 해야 해요”라고 강조했는데, 나는 대충 눈짐작으로 지도를 판별하며 가는 터라 너무 일찍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게 문제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모르니, 이리저리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잘 온 걸 거야. 그러니 계속 쭉 가보자’라는 마음과 ‘뭔가 이상한데, 다시 뒤로 되돌아가야 하나?’하는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하더라. 그래도 막상 길을 들어섰으니 어쩌랴, 그냥 가보는 수밖에는. 그 덕(탓)에 익산 용동면에서 한참을 헤매야 했다.
조금 들어가니 우체국도 보이고 면사무소도 보이더라. 어딘지 감은 오지 않았지만, 후배가 알려준 길과는 다른 길이란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점심시간도 되어 배도 고프겠다, 눈앞에 중화요리집도 보이겠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침도 제법 잘 챙겨 먹었는데, 조금 걸었다고 배가 고프긴 하더라. 역시 걷는 것만큼 밥맛을 좋게 해주는 것도 없다.
점심을 다 먹고도 길을 헤매야 했다. 솔직히 그냥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훨씬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무슨 고집인지 전혀 그러질 않았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니, 저 멀리 대로가 보이는 것 같긴 한데, 거기로 곧장 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더라. 거기로 가기 위해선 논을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 과연 그 논길이 대로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논은 애초에 정해진 길 같은 게 없으니, 가다 보면 어떻게든 저 대로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논길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다행히도 논길은 바로 대로와 이어져 있더라.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닌데, 해보지 않고서 생각만 너무 많았다.
드디어 너무나도 보고 싶던 어마어마하게 큰 도로에 당도했다. 4차선의 엄청난 위용을 과시하는 23번 국도였고 드디어 내 위치를 명확하게 알게 된 거였다. 고창 때는 완전히 오전 내내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나의 걸음은 빙글빙글 돌고♬’ 허탕을 쳤었는데, 그래도 이번엔 조금 헤매긴 했어도 허탕을 친 것이 아니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경험은 다양할수록 좋은 것 같다. 한 번 헤매고 두 번 헤매고 보니 나름의 요령도 생기고, 그만큼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23번 국도는 벌써 여러 번 거쳐 왔다. 특히나 영광에서 고창으로 올 때, 걸었던 그 악명 높은(?) 도로로 나에겐 각인되어 있다. 그땐 고속도로처럼 뻥뻥 뚫린 국도에 기가 질릴 때로 질렸지만, 지금은 길을 헤매던 터에 만난 덕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같은 도로를 걷는데도 역시 그때의 기분에 따라 감정은 이렇게도 확연히 다르기만 하다.
제대로 걸었으면 5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헤매는 바람에 8시간 정도 걸어서 논산에 도착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만 같다.
여행이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이것 또한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어제 무리한 탓에 인과응보로 그리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몰랐다. 걸어오다가 적당한 곳에서 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도 부족했고 다리는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꾹 참고 걸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논산에 도착해서 찜질을 하다보면 몸이 풀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논산 근방의 도로는 4차선 도로였다. 목적지는 코앞인데 걸어도 걸어도 논산은 보이지 않고 도로만 한없이 계속 되더라. 그 순간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마무리를 잘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그제야 알겠더라.
마라톤도 마지막 순간에 기운이 풀리며 등산도 정상이 보이는 시점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의식의 한계가 찾아오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눈에 보이니 ‘조금만 가면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이 풀어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조금만 더’를 수시로 외치며 마음을 다잡고 몸을 컨트롤하려 해보지만, 맘처럼 안 되니 말이다. 그러니 더 힘들 수밖에 없고, 몸은 아파올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순간을 어떻게든 감내하며 가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걸 거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뭘까? 그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하고자 하는 ‘긴장감’인 거다. 오히려 논산이 보이지 않을 때도 걸었는데 보이는 순간 그만 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결과 지금은 찜질방에서 짐을 풀고 누워서 여행기를 쓰고 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 더불어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잘 극복해낸 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때론 여행이 예상과는 달라서 힘들 때도 있다. 여행이 재밌기만 하다면, 그건 돈으로 산 여행이거나 여행 흉내만 낸 어떤 것이리라. 여행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실제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힘들고 괴로운 때도 있을 것이다. 실상 그 힘듦 덕에 소소한 일조차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 테다. 난 이제야 조금 여행이 무언지 알 거 같다. 그건 재밌기만,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듦 속에 재미가, 쾌락 속에 고통이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참 맛이다.
(볶음밥 4.000원, 칼국수 4.000원, 찜질방 6.000원 / 총합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