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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ug 24. 2018

카자흐스탄 가정집 저녁식사에 초대되다

2013년 6월 20일(목)

다음 장소는 굴심쌤 언니네 집이다. 저녁식사에 우리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저번에 LG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카자흐스탄 전통음식을 먹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상업화된 음식의 체험이었고 이번에 제대로 카자흐스탄의 가정식을 맛보게 되고, 일반 가정집은 어떤 지도 체험해볼 수 있다.               



▲ 굴심쌤 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




가슴 따뜻한 저녁 식사

     

언니네는 아파트에 살았다. 건물은 꽤 낡아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카펫이 여기저기 깔려 있고 넓은 집이 인상적이었다. 가족이 어찌나 많은지 대가족을 연상케 했다. 언니네는 아들 부부와 함께 살며 굴심쌤 자식들뿐만 아니라, 조카들도 방학을 맞아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인원만 12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좁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녁밥이 차려지는 동안 아이들은 어제부터 빡빡한 일정 때문에 씻지 못한 몸을 씻었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여독을 풀었다. 

저녁은 베스바르막이다. 알마티 식당에서 먹어본 경험이 있지만, 양이 적어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기에 이번엔 제대로 먹겠노라 벼르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선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에나 이 음식을 내놓는다고 한다. 음식 만드는 광경을 옆에서 바로 볼 수 있었다. 잘 끓여진 말고기와 순대처럼 보이는 가즈, 그리고 말고기를 끓인 육수에 수제비를 넣어 익힌다.



▲ 손님으로 초대 받았더니,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제대로 된 베스바르막을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한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여긴 우리처럼 정갈하게 상을 차리진 않나 보다. 상 여기저기에 빵과 캔디를 흩뿌려 놓고 개인당 접시를 배치했다. 자유분방한 상차림이지만, 오히려 풍족하게 보이기에 더욱 입맛을 자극한다. 

자신이 먹을 만큼 접시에 고기와 빵, 수제비를 담아 먹으면 된다. 양이 어찌나 많던지, 모든 아이들이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접시가 바닥을 보이기가 무섭게 음식을 또 덜어준다. 여긴 접시나 컵이 비는 것은 ‘대접이 소홀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밥을 먹는 동안 조카들은 돔브라를 직접 연주해 주기도 하고 우릴 위해 노래까지 불러줬다. 거기에 우리도 답례를 하듯 투간졔름Туған жер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주는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                



▲ 우릴 위해 특별 공연을 해준 조카.




우리네가 잊고 산 모습

     

그와 같은 어우러짐을 몸소 느끼고 있으니, 꼭 예전의 우리네 모습이 생각났다. 그 때 돈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집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을 초대하거나 김장을 하건, 부침개를 부치건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게 자연스러웠다. 일상에서 볼 수 있던 가슴 따뜻한 풍경들이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았다. 집은 넉넉하지 못해서 간장에 밥을 비벼 먹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화장품을 팔러 외판원이 오면, 할머니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인데도 밥을 먹이고 재워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볼품없는 단칸방이라도 사람들을 들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집은 엄청 좋아졌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좋아진 만큼 남을 들이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내 공간이 침해당할까봐, 깨끗한 집이 훼손당할까봐 등등의 생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집은 사람이 머물고 인연이 맺어지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더 이상 사람이 머물지 않고 인연이 맺어지지 않는 공간이 된 것이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마음은 빈곤해졌다. 우리네가 놓친 건 바로 이것이다.



▲ 환대해주고, 제대로 대접까지 받았다. 이렇게 뭉클한 시간이라니.



음식을 다 먹고 나선 샤이를 마셨다. 굴심쌤 언니네 아들 부부는 정성스럽게 우리에게 샤이를 대접해줬다. 샤이는 우유와 홍차를 섞어 마시는 것으로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이 일품이다. 단재학교 학생들도 같이 둘러 앉아 정성껏 따라주는 차를 마신다. 그때 굴심쌤이 “한 잔만 마시면 나만 잘 살고, 세 잔을 마시면 우리 모두 잘 살아요. 그러니 세 잔씩 마시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러면 한 잔만 마시면 되겠네요.”라고 농을 치는 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정말 한 잔만 꾸역꾸역 마시는 학생이 태반이었다. 물론 입맛에 맞지 않으면, 한 잔만 마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농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상황에서 왠지 모를 허탈감이 느꼈다. 우리네가 놓쳐온 것들이 이런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 드디어 알마티로 갑니다. 길고도 짧은 카자흐스탄 여행 속 아스타나 여행이었다.




고려인은 배신자?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오는데, 꼭 오래된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모든 가족들이 나와 인사를 해주더라. 헤어짐이 이렇게 아쉬운 적은 정말 오랜만이다. 

오는 기차는 더욱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교육원 선생님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고려인들이 한국에 가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면 나이 드신 분들은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기만 살겠다고 한국을 도망쳐 블로디보스톡으로 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여행기는 상당히 길어졌으므로 우슈토베에 가서 고려인 초기 정착지를 이야기할 때 이 내용을 조사해서 고려인들이 배신자가 맞는지? 나이 드신 분들은 고려인을 정말 배신자로 여기는지? 조사하여 쓰도록 하겠다. 

어찌 되었든 이로써 무박 3일의 알차고도 뿌듯했던 여행이 끝이 났다. 내일은 바로 탈디쿠르간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바로 자야만 한다. 알마티하고도 2주간 안녕이다. 



 ▲ 알마티로 돌아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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