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일)
수영장에선 왜 꼭 상의를 탈의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의문이다. 작년 망원수영장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상의를 입고 놀고 있으면 안내요원이 와서 상의를 벗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맨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눈을 피해가며 상의를 입은 채 놀 수밖에.
그런데 그 때 안전요원은 아니고, 의사 까운 비슷한 옷을 입은 중년의 러시아 여성분이 오시더니 한 학생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아마도 ‘상의를 입은 채 놀면 안 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정중하게 대답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그 학생은 눈을 붉히며 아니꼽다는 투로 받아쳤다. 어차피 서로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런 식의 반응이 나온 걸 테다. 하지만 메러비안 법칙Law of Mehrabian에 따르면, 소통에서 말의 내용은 7% 밖에 차지하지 않으며 언어적 요소(말투 38%)와 비언어적 요소(표정 30%, 태도 20%, 몸짓 5%)는 무려 93%나 차지한단다. 그래서 말은 알아들을 수 없다할지라도, 느낌은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도 그와 같은 태도와 말투에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해서 말을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 학생의 말투도 거칠어져 갔다. 그래서 그 학생을 제지시키고 그 분에겐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이 상황을 보며, 난 그 학생의 화가 엉뚱한 사람에게 퍼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기 또한 막상 화를 내야 할 사람에겐 화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 어찌 보면 러시아 여성분을 말도 통하지 않는 하찮은 사람, 즉 약한 고리쯤으로 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란 걸 알기에, 그동안 쌓인 화를 퍼부은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결코 그 학생만의 사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Go home and kick the dog’라는 속담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비겁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런 비겁한 느낌을 김수영은 한 폭의 시편에 담아냈다. 누구나 비루해보여서 피하고 싶은 감정을 김수영은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하는 부분에서 김수영과 우리는 달랐다. 우린 그 모습을 감추기에 급급했지만 김수영은 모든 사람에게 드러냈으며,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있지 않고 /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건 자신의 모습에 솔직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일 뿐이며, 아예 그런 비겁함조차 모르는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걸 직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다고 보아야 맞다.
그 학생에게 장광설을 펼치며 훈계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나의 위선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거대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뺨을 맞고 멸시당한 것을 담아뒀다가, 하찮다고 느끼는 것들에 퍼부어댈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잘도 둘러댔다. ‘니가 혼나야 할 일을 했기에, 너를 위하는 마음으로 혼내는 거야’라는 그럴 듯한 말로 말이다. 그래서 나 때문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상처 받고, 주눅 들었던 이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그 학생에게 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봤고, 동병상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현지 시간은 10시 48분. 6월의 마지막 밤이자 탈디쿠르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한국은 이미 1시 48분이니 7월이 됐지만 여긴 아직도 6월이다. 그렇게 보면 여기와 한국은 한 달의 시간차가 난다고도 할 수 있다. 동시간대에 한 달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6월과 7월의 난해한 구분선만큼이나 나도 그런 난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첫 해외여행인 카자흐스탄 프로젝트도 별 문제 없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굴심쌤이 없었다면,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많이 의존했고, 어쩌면 내가 굴심쌤 때문에 편하게 얹혀 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건 내가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보다, 운도 좋았고 여건도 좋았던 것뿐이다.
그런 인복 덕에 탈디쿠르간에서의 일주일도 잘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계획의 자잘한 부분들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보자면 엄청 만족하고 있다. 이젠 이곳 생활이 아주 익숙해졌고 거리를 지나면 볼 수 있는 광경들도 낯익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늘 보아오던 사람들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이 익숙해지는 만큼, 오히려 떠나온 자리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사람이란, 떠나보내고 맞이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머물러 있지 말자, 고립되어 있지 말자’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머물러 있은 들, 고립되어 있은 들 썩어가며 소외될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흘러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며, 6월의 마지막과 탈디쿠르간에서의 마지막 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