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an 06. 2019

손해 본다는 마음의 기저

2013년 7월 3일(수)

설거지를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학생을 보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건 단순히 손해와 이익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전에 봉사활동을 했다시피 그 순간만큼은 전체를 위해 봉사했다는 관점으로 보아도 되기 때문이다.                




증여와 교환

     

하지만 손해라는 것이 자본주의가 남긴 상흔傷痕임을 안다면, 그 상흔을 낫게 하기 위한 노력도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란 ‘사적 소유와 자아’가 그대로 ‘혼연일체’를 이루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유의 핵심이 바로 돈, 아니 화폐다. 돈과 화폐, 자본. 이 셋은 교환의 매개라는 면에선 동일하지만, 주체와 맺는 관계의 측면에선 그 속성이 조금씩 다르다. 돈이 좀 더 포괄적(약간 촌스러운) 명칭이라면 화폐나 자본은 특정한 교환관계를 표현하는 명칭에 해당한다. ‘교환’하면 곧바로 화폐를 떠올릴 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교환의 원조는 어디까지나 물물교환이다. 물건과 물건이 교환될 때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긴밀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른바 증여로서의 속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증여란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서비스, 여자, 어린이, 춤, 축제 등”을 함께 주고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시 부족들 사이의 증여와 답례 형식을 취하는 교환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사회총체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경제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사이의 유대 강화, 공동체적 질서 유지를 위해 교환한다는 것이다.”(『화폐, 마법의 사중주』, 174쪽) 말하자면, 교환보다는 증여가 더 주도적인 배치인 것.

하지만 이 배치가 전도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 사이엔 치명적인 거리가 생겨난다.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는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폐가 탄생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대 그리스의 현명한 왕 미다스는 화폐가 발명된 것을 알고 화폐를 손에 들고 들여다봤는데, 그 순간 끔찍한 예감에 휩싸여 들고 있던 화폐를 엉겁결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외쳤다.”―“이 화폐라는 것은 대지를 죽일 것이다!” 미다스 왕은 화폐 그 자체가 대지에 대한 저주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116쪽) 과연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화폐는 탄생하자마자 마주치는 모든 것들―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삶이든 가치든―의 고유성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고미숙, 『호모 코뮤니타스』, 그린비 출판사, 66p       


   

자본주의의 등장은 길게 잡아봐야 3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자본주의’라고 하면 예전부터 있었고 앞으로 쭉 지속될 체제로 보게 되었다. 한국은 겨우 100년 사이에 자본주의 사회로 급속도로 편입되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 사회는 그러지 않았고, 미래의 사회도 전혀 다른 체제로 발전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란 것도 사회의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환만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 증여의 감각을 놓치다

     

과거 시대엔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다. 증여贈與가 사회유지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증여는 ‘무언가를 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준다는 것에는 그와 똑같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묶을 수 있는 ‘화폐’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준 것의 가치를 따질 수 없고, 보답으로 준 것의 가치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코코아를 따다주면, 그걸 받은 사람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며 답례를 표시하는 것이 가능했다. 증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에 대한 진심의 여부였고 그 진심이 통하는 선에선 무엇이든 가능했다. 

하지만 화폐가 발명되고, ‘10.000원’이라고 찍힌 지폐에 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사적소유가 가능해지자 상황은 급격하게 변해갔다. 모든 것이 개인의 고유한 가치를 잃고 화폐의 단위로 획일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나의 가치와 너의 가치를 돈이란 잣대로 단순 비교할 수 있고, 내가 보낸 하루가 얼마인지 따질 수 있으며, 파업으로 인한 손실이 얼마인지 즉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누이배뚱’ 핸드백을 사줬을 때, 노래나 편지로 답례하는 건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미묘한 감정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교환이 증여를 대체하며, 화폐 가치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미덕은 극단적인 효율주의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이며, 적은 시간동안 공부하여 성적이 오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불로소득’이나 ‘속성과외’와 같은 게 등장했고 암묵적으로 권장되게 되었으며 ‘남보다 더 하는 건 손해’라는 생각을 낳게 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지금 사회는 차디찬 이성, 외롭게 홀로선 개인만 있을 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정감어린 감정이랄지, ‘우리 함께 보듬어 가며 살자’라는 공동체적인 마음이 없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유는 혼자 선 살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능력이 발휘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건강한 사회가 되고,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모든 걸 획일화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의 잣대로 본다. 이러다간 공동체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동체의 와해는 개인의 붕괴를 낳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