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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9. 2019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감수성을 발달시킨다

공생의 필살기5

‘자연의 무질서함을 보고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게 될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이야기를 우치다샘이 굳이 하신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외적 자연물을 보아도 이러한데, 내적 자연물인 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경이로움으로 자신의 몸을 만나라 

    

자연을 보고 불규칙 속에 규칙을 발견하는 몸부림은 예전처럼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땐, 자연히 습득되는 것이었다. 그땐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와선 동네 어귀에 모여들어 밤까지 놀았고, 엄마의 “~~~야 밥 먹어라!”라는 소리에 맞춰 흩어지곤 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연을 관찰하고 그 안에 법칙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며 ‘교육일번지’와 같은 교육환경(도시환경)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지금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과는 더욱 멀어져 지성이 극대화될 계기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도시엔 희망이 없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결론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나마 희망이라고 한다면, 인공적인 환경 속에 갇혀 있어도 몸은 자연물이기 때문에 자연을 바라보며 법칙성을 발견하려 노력하듯,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떤 법칙성을 발견하려 노력한다면, 지성은 발달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치다쌤은 “기본적인 자연물인 몸을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과 경이驚異입니다.”라고 얘기한다.                



▲ 위의 사진은 2014는 여름 모임 때 구운천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 아이는 호기심과 경이로움의 존재들이다.




지성은 공생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왜 지성을 발달시켜야 하나?’라는 물음이 당연히 뒤따른다. 지성이 발달되지 않아도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아예 ‘지성을 일찍부터 죽여야만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도 들 법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오늘 강연 주제를 망각해야지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분명히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고, 다른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공동체를 거부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그런데 ‘공생’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 자체에도 이미 어폐가 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생’은 필수이기에 ‘공생’의 감각을 망각하게 되면 자기 자신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극단적으로 개인화를 부추기고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라는 식의 우정을 묵사발 만드는 광고에 흔들려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발달시키는 일은 어쩌다 보니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 성공이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친구를 경쟁자로 만들어 버린다.




감수성공생의 기본 조건

     

그렇다면 지성의 발달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불쾌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우치다쌤은 “불쾌감을 피하려 할 때 인간의 몸은 정확한 반응을 보입니다. 무도의 수행이라는 건 ‘뭔가 불쾌한 것이 다가올 때 어떻게 피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을 운동능력이나 신체능력이라 부르기보다는 감수성이라 해야 맞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싫은 것은 피하라’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고, 더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을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라, ‘미세한 것에 반응하는 능력’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불쾌감이나 위기감을 감지하고 피하는 것이 바로 감수성이니 말이다. 산소량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되기 전엔 잠수함 맨 밑바닥에 토끼를 태워 잠행을 했다고 한다. 토끼는 산소량에 민감하여 조금만이라도 산소량이 부족하면 죽기 때문에, 토끼의 상태를 보고 잠수함 내의 산소량을 체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처럼 감수성이란 ‘잠수함 속 토끼(이건 탄광에서 카나리아를 키우는 이치와 같음)’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그런 감각을 통해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생’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족이지만 우치다쌤은 “보통 남자들은 어떤 불쾌감이 느껴지면 완력으로 제압하려 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해가 안 되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이르면 대립하여 이기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그 상태를 즐기며 함께 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며, 남자들이 무도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 얘기해줬다. 여기까지 들으니 되게 뜨끔해졌다. ‘나 지금껏 되게 감수성 부족하게 각만 세우며 살아왔구나’라는 생각과 ‘공생보단 혼자 살아보려 무진 애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감수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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