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의 필살기4
무도의 속성이 나의 몸을 타자로 대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상생의 존재로 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저번 후기에서 밝혔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처럼 경쟁이 체화된 존재들은 무도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치다쌤은 “좋은 직장을 다니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자기 몸을 소유물이라 생각하니 맘껏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열심히 무도를 가르쳤는데도 잘 되지 않으면 그 때 저에게 ‘제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몸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도착倒錯적인 생각입니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즉, 남성주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몸=도구’라는 생각을 당연시하게 되었으며 몸을 컨트롤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게 되었다는 진단이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몸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결코 쉽지 않으며 그런 생각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비로소 ‘공생’에 대한 실마리도 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난 실용서처럼 몇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제시되는 공생의 필살기를 듣고 싶었는데 비법을 알려주기보다, 시작에서부터 ‘바꿔♬ 바꿔♬ 몸에 대한 생각을 다 바꿔♬’라고 말씀하시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생의 대상이 ‘다른 사람과의 공생’과 같은 흔히 생각할 법한 내용이 아닌 ‘내 몸과의 공생’이라고 하는 순간, 그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여기까지의 얘기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우치다쌤은 강연을 하는 목적을 충실히 달성해 가고 있었고 그만큼 우리는 처음 듣는 얘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를 선언할 수도 없다. 이래봬도 난 딱딱함의 대명사 건빵 아닌가? 혼란 속에서 버티고 버티며 비법이 공개되는 순간까지 버텨야 한다. 모르니 조금이라도 알게 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야 한다.
이때 ‘몸=자연물’이란 메타포는 그냥 던진 말은 아니었다. 우치다쌤은 “인간의 지성이 활발해지는 때는 자연과 대면했을 때입니다.”라고 명료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혼자서 심심할 겨를도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전자기기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니 혼자 놔둔다 해도 사색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아이를 전자기기가 전혀 없는 자연 속에 가만히 놔두면 처음엔 아무 것도 안 하지만 곧 싫증을 느껴 무언가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나무, 하늘, 꽃 등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 어느 순간 아이가 활짝 웃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불규칙한 움직임 속에 어떤 패턴을 발견했고 그걸 확인한 순간이다. 바로 이때가 아이의 지성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다.
나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격포의 방죽에 앉아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탓하고 깡소주를 마시며 밀려오는 파도에 떠 있는 바나나 껍질을 멍하니 쳐다보았던 적이 있었다. 부평초처럼 둥둥 떠 있는 바나나가 인생이란 파도에 정처 없이 떠도는 나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응시했었다. 근데 그 바나나껍질은 파도의 흐름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는 있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랜 시간 보다 보니 달의 인력으로 인해 서서히 방죽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심심하니, 아니 깊은 체념에 빠지다 보니 별 짓 다하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으리라.
이에 대해 우치다쌤은 “이게 바로 지성이 발동하는 순간이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며 그 노력이 완수되어 법칙이 발견될 때 가슴은 두근거리게 된다.”고 했는데 나 또한 그 순간 어떤 두근거림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