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개풍관의 교육실험’ 4
이렇게 다른 관점의 교육을 염두에 둘 수 있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처럼 혼자만 고군분투하거나 내 능력이 별로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만 외로워지고 주변의 시선에 자신의 열정만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국에선 동시다발적으로 그러면서도 자발적으로 여러 교육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교육운동들이 하나의 전국적인 네트워크망을 통해 연결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독립적으로 해나가면 충분하다고 본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교사라는 큰 묶음 속에서 개개의 교사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너무 큰 그림을 가지고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고, 전체의 의견을 모으는 가운데 좌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바로 나부터 하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은 혼자 하지만,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어서 그들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떨어져 있지만 그건 고립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교육이란 게 뭔가 특별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기에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도 해나가고 있는 일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은 근대 일본을 지탱하는 가장 성공한 교육기관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특별히 가르치지 않고 ‘자학자습自學自習’하도록 하며, 사회에 유익한 인물을 길러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열심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요시다의 인품에 반해 그리된 것이다.
그와 같이 학생수가 몇 명이냐, 커리큘럼은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배움이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냐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교육은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이 말을 현실적으로 풀자면 개풍관에서 중고생들은 합기도를 배우고 있을 뿐이다. 오감을 민감하게 하여, 내부세계로 들어온 감각을 느끼고 서로 발산해내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살아라’, ‘이건 꼭 해라’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으며, 합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그런데 합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자연히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해 나간다.
합기도엔 기본적으로 몸을 개방하고 오감을 민감히 하는 메커니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리게 되어 있다. 방어적인 자세란 곧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고, 기성 세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합기도를 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어른을 신뢰하게 되어, 그게 된 아이만이 다음 단계로 성장해나갈 수 있다.
교육이란 복잡하거나 체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어린이들이 어떻게 배우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사물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쳐다볼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산이나 들로 나가서 돌아다니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것에 꽂히면 거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벌레를 본다거나, 꽃을 본다거나, 강의 흐름을 본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신을 집중한다. 곁에서 보고 얼핏 보고 있으면 멍을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이는 이미 거기에 빨려 들어가듯 몰입하며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몰입이 가능한 것일까? 그건 그 아이가 패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그마한 파도가 몇 번 온 다음에 큰 파도가 온다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수없는 관찰을 통해 패턴을 발견했지만, 그걸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시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법칙을 스스로 확정짓게 된다. 자기 스스로 패턴을 발견하고 법칙을 확정했기에 그 순간의 감격에 젖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과학적 지성의 활동이며 종교적 영성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이란 것은 카오스 속에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지성적인 활동이나, 영성적인 활동은 아이들 스스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몸을 개방하고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기본이 되어야만 한다.
그 때 교사는 교사들끼리 협력하여 아이들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도장의 ‘개풍관’이란 이름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남쪽에서 산들바람 불어와, 가시나무 새싹을 어루만지네. 가시나무 새싹이 어려서 어머니의 수고가 많았네- 凱風自南 吹彼棘心 棘心夭夭 母氏劬勞)’에서 따온 것이다. 『시경』에서 나오는 시들 자체가 러브송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교육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도장 이름으로 썼다. 초여름에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느덧 봉우리가 열리고 꽃이 피어나는 그 형상을 그리며, ‘개풍관’이라 이름 지은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교육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사실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서 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과 내용이 깊어지고 어려워지지만 같은 내용의 반복이기에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배우는 내용은 어느 시기가 왔을 때 1년이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그건 중고등학교라 해도 다르지 않다. 12년 교육이지만 3년 만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항상 긴장해야만 공부할 수 있고, 처음부터 꾸준히 해야만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짤 순 없다. 그건 어른도 할 수 없는 일로, 인간의 특성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 몰입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충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의 교육과정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배움의 스위치가 켜질까, 부모들은 벌써부터 궁금해질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스위치를 켜고 싶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빠르게 하려 할수록 오히려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欲速則不達’고 서둘러서는 결코 안 된다. 그건 누군가 억지로 끌고 간다고, 상황을 만들어진다고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은데’, ‘나도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 배움의 스위치가 켜진다. 동경이나 선망을 할 때 비로소 스위치는 작동된다. 바로 그 순간부터 열심히 하게 되면 1년 만에 다 따라잡을 수 있다. 음악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뭐든지 할 것 없이 말이다. 이런 이유로 대학자 중엔 만학도가 많다. 그러니 아이 스스로 어느 단계에서 ‘하고 싶은 게 뭐야?’, ‘알고 싶은 게 뭐야?’라고 자기에게 묻는 순간들이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이의 재능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과 그걸 지켜볼 수 있는 인내력,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이 아이의 재능이 언젠가는 개화할 거라는 믿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하는 동안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조급해해서도, ‘넌 안 돼’라는 비관에 빠져서도 안 된다. 그저 나와 지내는 동안 오감을 활짝 열고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된다.
목차
점차 교육의 다양성을 파괴해 나가다
학교의 기업화는 교육의 자살행위
소비자 마인드는 필연적으로 학력저하로 이어진다
교육계를 끊임없이 공격한 매스컴과 미디어
그런 공격에 모든 것을 맞추려 노력하게 된 교육기관
성숙한 인간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학교
개풍관은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곳
개풍관은 자연의 힘을 신체에 흘려보내는 곳
최초의 학교가 만들어질 때 모습 상상하기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지닌 교사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육은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운동의 시작은 각자 할 수 있는 것부터
교육이란 가르쳐 주는 게 아닌,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같은 교육을 꿈꾸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 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