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10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50년대 미국의 한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과는 무려 60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그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전혀 낯설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그만큼 선진적인(?) 미국의 교육제도를 잘 따라갔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미국은 예전부터 경쟁주의의 사회였고 한국도 그런 풍조가 있었으나 IMF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며 급속도로 닮아갔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다 보니 지금 한국의 학생들은 여전히 토드처럼 자기표현을 잘 하지 못하며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살아가야 하고, 닐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을지라도 ‘그렇게 해서 나중에 먹고 살 수나 있겠냐?’, ‘단순한 호기심에 그러는 거다’,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나중에 대학에 간 다음에, 취직한 다음에도 맘껏 할 수 있으니, 그 때 가서 실컷 하라’고 다그치기에 마음을 접으며, 녹스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더라도 ‘연애와 공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순 없다’, ‘지금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남편(아내) 얼굴이 바뀐다’며 안 좋은 시선으로 보기에 관계도 제대로 맺어보지 못한다. 공부라는 하나의 대의를 위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진정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열정을, 이성에 대한 긍정적인 애정을 모두 짓밟혔고 정형화된 하나의 성공 신화만을 써나가야 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다는 이유로 제재하고,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기라며 표현하지 못하게 하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며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들을 관두게 한다. 그러니 아이들은 점차 성장해가며 무기력해지고, 나약해지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이런 학생들에게 ‘지금-현재를 살아(Carpe Diem)’라고 외치는 외계 생물체(?) 같은 교사가 나타나, 여느 교사와는 다른, 여느 부모와는 다른 말을 하니 학생들은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 영화는 바로 억누르려 하는 교육 체제와 그런 교육 체제를 전면으로 맞서며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하려는 교사 사이의 갈등과, 그런 교육에 감동하여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학생과 그들과 공명하며 한 걸음씩 나가는 교사 사이의 우정을 다뤘다.
하지만 아무리 영화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아름답게 그려졌다고 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이게 어디까지나 극화된 내용이며, 교육의 장은 여러 욕망이 상충되는 공간이기에 일차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교육 현장에서 무작정 키팅처럼 했다간 교사는 교사대로 상처만 받고, 학생은 학생대로 더욱 더 맘을 닫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쯤에서 제격인 말은 ‘영화는 영화일 뿐, 따라하지 말자’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부분들이 문제가 되는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키팅의 탁월함을 너무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 한 명이 아등바등해서 바뀌는 건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남다른 능력만이 부각되고, 그만이 유명한 교사로 이름이 날릴 뿐이다.
흔히 한국이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것을 ‘박정희 각하의 능력’으로 여기며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현장에서 부조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피땀 흘린 수많은 ‘전태일들’과 모진 고문과 핍박에도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수많은 ‘김근태들’과 유신체제에 반발하며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려 한 ‘인혁당 사람들’ 외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알알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한 사람의 업적이나 능력으로만 평가한다면 그건 짧고도 미련한 생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학교에서도 어떤 변화나 가능성을 한 교사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 ‘눈덩이 프로젝트 모임’을 했을 때, 민쌤은 “교사 한 개인의 열정으로 학교가 혁신되고 바로 잡힌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개인의 초인적인 힘에 의지하면 그 개인의 전설만 부각되다가 사라질 뿐 학교 자체는 어떤 변화도 없으니 말이죠.”라고 일갈하며, 교사 개인만을 부각시키는 현실을 비판했던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열정 있는 교사가 있는 곳엔 희망이 샘솟고 학생들이 살아나며, 교육의 혁신이 일어날 것만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게 오히려 학교의 분위기엔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쌤은 “평범한 교사들이 그냥 교사생활을 하더라도 그게 교육이 정상화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동섭쌤이 말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되자’라는 말과 맞닿아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교사가 열정적이라고 학생들이 열정적이게 되는 것도 아니며, 교사가 앞서 간다고 학생들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둘째, 교사가 교육에 대한 욕심을 내면 낼수록, ‘학생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학생과의 관계는 왜곡된다는 점이다.
흔히 교사가 학생들에 비해 앞서서 생각할수록, 앞서서 계획할수록 학생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소외되게 마련이고, 교사가 가르쳐주고 싶은 게 많으면 많을수록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보다 한 걸음 앞서 가선 안 되며, 반보만 앞서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교사가 된 입장에선 하나라도 더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고, 자신이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다 보니, 의욕이 앞설 때가 많다. 그래서 수많은 교사들이 개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교사연수도 다니며 남다른 수업방법이나, 학생에 대한 다양한 이해방법이나, 요즘 핫한 교육철학 등을 공부하여 바로 현장에 적응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교사가 배운 것을 그대로 적응하려 하는 순간, 엄청난 오해가 생기며 자신이 의도한 것과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섭쌤은 많은 교사연수를 다니다 보니, 한결 같이 교사들은 ‘그래서 수업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나요?’를 묻더라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린 해결책이나 처방전을 받고 그걸 곧바로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과유불급이 된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준규쌤은 교컴수련회 때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마세요. 그저 잘리지 않을 정도로 하면 되거든요. 차라리 열심히 하고자 하는 열정을 다른 곳에 퍼부으시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애정을 쏟은 만큼, 심혈을 기울인 만큼 그에 따른 결과나 변화가 나타나길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땐 교육에 대해 회의하고, 학생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그러니 학생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려 하기보다 다양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교사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학생들에게 훈습되는 것이니 말이다.
셋째, 교육의 성과나 학생들의 변화는 곧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소년 대안교육, 새로운 전환의 모색’이라는 포럼에서 경옥쌤은 대안교육이 처음 시작될 때와 현재 학생의 차이점에 대해 “그 당시(90년대 말)와는 달리 지금은 자발적으로 학교를 나오는 아이들은 줄어들었고,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고 하고 싶은 게 없지만, 학교에서 견디는 건 힘들어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그만큼 지금은 교사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며, ‘카르페디엠’이란 화두를 던진다 해도 그에 대해 관심도 없고, 감정의 울림조차 없는 무기력한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 키팅이 환생하여 학생들을 만난다 해도, 그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를 목도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교육이란 애초에 A를 줬기 때문에 A가 결과로 나오는 교환 행위가 아니라, A를 줬음에도 언제 결과가 나올지, 그리고 그 결과가 A가 아닌 다른 형태로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증여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치다쌤은 ‘공들인 것과는 다른 모양새로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되돌아오는 시스템’이라 누누이 말한 것이다.
교육의 속성이 그러하다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가시적인 형태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벌벌 떨며 스스로를 채찍질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의 마주침을 맘껏 즐기며 그 순간을 잘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영화를 보며 키팅 같은 교사가 되길 꿈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교육의 속성을 이해하여 조급해하지 말고, 훌륭한 리더가 되려 하지 말고, 그저 자기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재미지게 배워나갈 수 있으면 된다.
처음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의 감상평을 썼던 것은 2009년이었다. 그 당시엔 심혈을 기울여 썼지만, 이대로 묻어버리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7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편집하여 올릴 마음에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7년이란 시간동안 단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게 됐고, 학생들과의 경험이 쌓이면서, 단순히 편집하는 정도만으로는 지금의 생각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2009년에 썼던 내용을 저본底本으로 삼고, 영화의 내용을 보충하고 나의 생각을 첨가하여, 이처럼 10편의 후기를 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글이란 게 나의 의지와는 별개의 생명력을 지닌 것’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 ‘잘 써야겠다는 의지’를 앞세웠으면, 부담도 되고 긴장도 되어 이렇게까지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이 영화가 나를 통해 어떤 내용으로 쏟아져 나오는지 보자’라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풀어내다 보니, 여기까지 쓰게 된 것뿐이다. 어찌 보면 영화가 나를 통해 하고자 하는 얘기들을 그저 대필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 대해서도 저자의 생각과는 하등 상관없는 ‘책이야말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했었는데, 글에 대해서도 지금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고 생각한다.
이 후기는 단재학교 5년 차 교사(4년 차 교사 후기도 썼었는데, 얼렁뚱땅 1년이 흘렀다)로 접어든 지금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롭게 활력소를 얻는 과정에서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후기의 내용을 기본으로 삼아 2학기에도 아이들과 신나게 살아볼 생각이다. 지금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 믿으며, ‘지금-여기’를 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