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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24. 2019

홍만종의 시평에 발분하는 마음

한문이란 늪에 빠지다3

이번엔 새로운 아이들도 함께 참석했다. 현종이와 지인이가 그들이다. 작년엔 오고 가며 얼핏얼핏 봤던 아이들인데 뒷풀이에 함께 하게 되면서 좀 더 말을 해볼 수 있었다.                




홍만종의 시평을 보며 발분하는 마음이 생기다 

    

현종이는 오늘 스터디 준비를 하면서 특히 4번 글을 보며 “만약 홍만종의 시에 대한 평가가 없다고 한다면, 제가 홍만종처럼 저런 시평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엔 한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고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충분히 읽혔다. 단순히 해석이 되느냐 정도로 보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홍만종에 충분히 이입하여 글의 의미까지 탐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발분하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그 마음은 간직한 채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화시평엔 어쩔 수 없이 홍만종의 시선과 철학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건 누가 뭐라 해도 홍만종의 해석이고 홍만종의 시각이다. 그러니 굳이 그것에 자신의 철학과 감상을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볼 때 재밌는 점은 그때의 심정, 상황, 지식의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작품을 쓴 사람의 의도는 있겠지만,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읽고 싶은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반 완성품’이란 말을 굳이 썼던 것이고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에 작품엔 무수히 많은 해석들이 달리게 된 것이다. 그처럼 이미 현종이도 글을 읽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시평을 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 보름에서 이틀이 지났지만 달은 휘영청  밝았다.




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그게 시의 맛이다

     

특히나 이번에 스터디를 할 때 이런 식의 상반되는 해석들이 많이 등장했다. 예를 들면 하권 15 같은 경우 홍만종은 청간정에 간 심희수가 눈을 감고 사각거리는 백사장을 지나 백척루에 올랐다는 시에 대해 ‘사각사각 신선길을 눈 감고 지났으니, 이 어른의 이 행차는 헛된 걸음이라 할 만하다.沙鳴仙路, 閉眼而過, 此老此行, 可謂虛度.’고 시평을 달았다. 그 말은 ‘그처럼 경관이 좋은 곳에서 눈을 감고 갔다니요. 그건 헛 여행이군요.’라는 평인 것이다. 그에 대해 교수님은 ‘말에 몸을 맡기고 그 자연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 꿈결처럼 갔더니 어느새 백척루에 몸이 이르러 있다’는 느낌으로 풀이해줬다.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듯이 정말 행복한 순간들은 훌쩍 지나간다. 그때는 마치 시간이 24시간이 아니라, 1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걸 황홀경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심희수 또한 그런 황홀경을 이 시에 담은 것이지, 경관 따위는 보지 않았네라는 느낌을 담은 것은 아니란 얘기다. 역시 교수님의 해석엔 한시의 맛이 듬뿍 담겨 있다. 그건 홍만종의 이지적인 해석과는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현종이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눈을 감은 이유는 바로 ‘사각거리는 모래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듣기 위해서’라는 해석이다. 2014년에 경험했던 ‘어둠 속의 대화’는 잊고 있던 감각에 대한 선명한 느낌을 안겨줬다. 시각이 사라지자 촉각, 청각이 살아나며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처럼 현종이의 해석대로 보자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 바닷가의 온갖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한 것이다. 거기엔 당연히 모래소리도 있었을 것이고 시원한 바람소리,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 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니 적어도 하권 15번에 있어서 만큼은 홍만종의 이지적인 해석보다 교수님의 해석이나 현종이의 해석이 훨씬 맛깔스럽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  천간정에서 백척루까지 가는 길에 대한 시평이 여러 감상을  낳았다.




한문공부가 하나의 변곡점이 되길 

    

밤늦도록 우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거기엔 한문을 제대로 맛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는 ‘한문’이란 것이었고 이걸 통해 나래를 펼쳐내고 싶은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고 싶을 때 그리고 해야만 할 때 맘껏 타올라라. 그렇게 재만 남는다 해도, 그래서 무언가 이루지 못했다 해도 후회는 없으리라. 더욱 분명한 건 그런 열정적인 순간들을 통과하고 나면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러니 후회할 생각에 이도 저도 못하는 바보가 되기보단, 맘껏 저지르고 맘껏 해보며 무수한 변곡점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변화의 간극을 정자는 아주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정자가 말했다. “『논어』를 읽었는데, 어떤 사람은 읽기를 마친 후에도 아무런 일이 없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읽기를 마친 후에 내용 중 한두 구절을 얻었다고 좋아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읽기를 마친 후에 알게 되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읽기를 마친 후에 곧바로 손은 절로 춤추고 발은 절로 리듬을 밟기도 한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論語』 集註序說     


     

내가 바라는 것도 한문을 공부하고 난 후에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손은 절로 춤추고 발은 절로 리듬을 밟는 사람手之舞之足之蹈之者’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만큼 신나게 그만큼 열나게 공부해보자. 



▲  이 날 우리가 먹었던 안주들. 어떤 안주보다 맛나고  술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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