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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19. 2019

지리산의 가을정취와 화엄사에서의 점심공양

2013년 11월 11일


화엄사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배낭을 메고 올라간다. 오늘부터 날씨가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어서 아이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가을 속을 거닐 때사람은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현세와 지민이는 장갑을 준비하지 못했고, 건호는 목요일에 비가 온다던데 우의를 준비하지 못했다. 정류장 근처 상점에서 살까 했지만, 막상 그런 물품을 살만한 가게도 없었다. 이젠 대피소 밖에 믿을 곳이 없다. 

화엄사로 가는 길은 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을의 싱그러움은 단풍을 통해 그 면면을 드러낸다. 단풍은 사람을 감성적이게 만든다. 이성적인 사고가 세상을 분절하여 인식하게 하며 사람을 예리하게 파헤쳐 요소요소를 분석하게 한다. 일정 부분 분석적인 사고는 명확하게 정의하도록 도와주기에 필요한 작업이지만 너무나 이성적인 사고에만 함몰되는 데서 생기는 폐단 또한 적지 않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성적인 사고에 빠져드는 일이다. 감성은 세상을 공감의 눈으로 보게 하며 사람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땐 이해타산 같은 경제적인 관념이 아니라, 화엄사상과 같은 만물일체의 관념으로 너그럽게 바라보도록 한다. 그래서 가을은 날씨가 서서히 추워지지만 마음은 서서히 따스해져가는 그런 계절이라 할 수 있다.                



▲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들. 이 순간엔  배낭의  무게만 느껴져 가을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화엄사에서 절밥을 먹다  

   

점심공양 시간은 11시 30분인데 우린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화엄사를 잠시 둘러보고 점심공양을 할 수 있는지 비구니 스님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요즘 등산객이 많아지면서 예약을 해야만 점심공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기에 어떤 방법이 없겠냐고 묻자, 종무소에 가서 이야기해보라는 대답을 해주셨다. 



▲ 드디어 화엄사에 들어왔다. 지리산 여행의 시작점이었던 곳.



아이들은 ‘왜 미리 조사하지 않았냐’, ‘이렇게 굶주리게 할 참이냐’하는 불만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장에서 부딪힐 수 있는 장면인 걸 어쩌랴. 모든 게 완비되어야만 떠날 수 있고,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부딪힐 뿐이다. 이때 건호는 오히려 태연하게 반응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이상 불평하기보다 해결하려 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런 때 보면 건호는 확실히 야생에 강한 타입이란 걸,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란 걸 알 수 있다. 

우린 배낭을 짊어지고 종무소로 향했다. 건호는 종무소의 문을 열며, “죄송한데요. 저희가 점심 공양을 하고 싶은데, 예약을 하진 못했어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자 직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셔서 그냥 드시면 되세요.”라고 답해주셨다. 단체 손님이 아닌 이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잘 해결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 공양간. 一日不作 貳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이틀을 굶는다),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구절.



이로써 처음으로 절밥을 먹어본다. 스님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밥을 먹더라. 냉면 그릇에 밥을 덜고 갖가지 채소로 정성스레 만들어진 반찬을 밥 위에 얹었다. 앞으로 며칠간은 이와 같은 정성이 들어간 식단을 먹지 못하기 때문인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공양을 할 때는 묵언을 해야 한다. 늘 왁자지껄 떠들며 노는 아이들에겐 그런 분위기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고, 절에서 먹는 밥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절밥은 적절히 짜지도 달지도 않아서 한 그릇 배불리 먹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산 종주를 시작해볼까.     


   

▲ 함께 정성스레 차려진 밥을 먹는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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