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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Feb 26. 2019

열정으로 우린 노고단에 올랐다

2013년 11월 11일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취사장으로 갔고 난 안내소에 가서 자리 배정을 받았다. 소등 시간은 9시고 새벽 4시부터 등산을 할 수 있으며 8시까지 퇴실해야 한단다. 9시에 소등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건 이곳은 숙박하기 위한 곳이 아닌, 등산하기 위해 잠시 몸을 누이는 곳이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피소에서 묵다보면 절로 산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처음에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을 땐 당연히 텐트를 가지고 비박을 할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뭔가 제대로 종주를 하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인데, 그리 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 후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노고단 대피소에 처음으로 오다 

    

모포를 빌리는 돈은 2.000원이고 대피소 안엔 노고단의 역사와 지리산을 소개해주는 자료들이 많았다. 전기코드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충전할 수 있는 코드가 꽤 많이 있었다. 이로써 캠코터 배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다. 

자는 곳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은 남성들이 자는 곳이었고 2층은 여성들이 자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어서 온 몸이 사르르 녹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발냄새가 진동하더라. 어쩔 수 없다. 모두 다 이런 각오쯤은 하고 온 터라 그에 관해선 아무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넉넉한 맘가짐들이야말로 지리산이란 대자연이 주는 푸근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는 문이 있는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꼭 군대의 침상 같은 느낌.




열정그건 내맡김

     

건호는 밥을 여러 번 해봤는지, 압력밥솥에 한 것보다도 더 맛있게 밥을 했다. 밥을 덜고 코펠에 즉석 육개장을 끓여서 배불리 먹었다. 

배도 차고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도 드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아이들이 도중에 그만둔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지만, 막상 현실에 놓이자 당연한 듯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 것인가 보다.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이병률, 『끌림』 


         

열정이란 별 게 아니다. 강물에 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몸을 던질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영화팀 친구들은 이미 강물에 몸을 던졌고 그것에 몸을 맡겨 본 사람들이다. 그것만으로 됐다. 그것만으로 열정이 드러난 것이기에 됐다.                



▲ 건호가 해준 밥은 맛있었다.




별천지를 보며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다

     

새벽녘에 소변을 보러 밖에 나왔다. 문을 열고 밖에 나왔는데, 시커먼 하늘에 수많은 빛들이 보여서 깜짝 놀랐다. 우슈토베에서 본 밤하늘의 풍경보다 더 경이로웠다. 깊은 어둠 속에서 나에게 엄습해 들어오는 미지의 생명체라도 본 듯이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가서 안경을 끼고 다시 나와서 보니, 함성이 절로 났다. 

최근 『그래비티』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광활한 우주를 헤매는 두려움이 잘 와 닿지 않아서 크나큰 감흥은 없었는데, 노고단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그제야 그 느낌이 무언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무언가와 대면하는 불안감이며 나의 심연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포가 겉으로 드러나는 무서움이었던 것이다. 우주란 어찌 보면 나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의 알지 못하는 절망, 슬픔, 고뇌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우주란 나의 자의식들이 분출된 것이다’라고. 늘 우리의 곁에 있었지만, 무수한 빛 공해로 볼 수 없었던 자연을 이곳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이로써 대장정의 첫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아쉽게도 직접 찍은 사진은 없지만, 딱 위 사진의 느낌과 가까웠다. (출처-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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