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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OJT

by 무딘

“OJT요?”

“On the Job training, OJT! 왜들이랴. 우리 일이 말로 씨부려 가지고 되간? 몸으로 부비대며 배워야쟤. 퍼뜩 인나, 가게.”


기껏 내려놓은 진초록 배낭을 다시 메는 일권.

툴툴거리며 9층 끝에 위치한 장비실로 향했다.

유니가 얼떨떨해하는 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얼른 일권의 뒤를 쫓았다.


장비실로 들어선 일권은, 일렬로 죽 늘어선 캐비닛 중 자신의 이름이 쓰인 캐비닛 앞에 멈춰 섰다.

유리문에 손을 대자 ‘띠리릭’ 전자음이 나며 문이 열렸다.


“내 한 번만 말해 줄라니, 잘 들으소. 장비래 봐야 사실 별 거 읎어. 이거시 ‘레이야 워치(Layer watch)’, 글고 이것이 ‘고글(gogle)’.”


일권이 무지개 빛이 도는 고글과 둥근 손목시계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리에게 흔들어 보였다.


“레이야 워치는 비상 포탈도 만들고 간단한 방호구를 소환하는 용도여.”

“사실 저게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야.”


유니가 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글은 통신도 되지만 상대의 에테르 레벨을 확인하는 용도로 더 자주 쓴당께. 가만있어봐, 에테르 레벨이 뭔지는 알제?”


일권의 질문에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는 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권이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선배도 너무한다. 중간계 온 지 하루도 안 지났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유니가 바로 옆 자신의 캐비닛을 열며 말했다.

안에서 대각선으로 매는 작은 쌕(sack)을 빼내더니, 지퍼를 열어 고글을 꺼냈다.


“에테르는 이 세계의 영혼들이 가지는 능력치야. 파란색이 제일 낮고 빨간색이 제일 높지. 신형은 수치로도 표현된다는데 우리 건 구형이라 색깔만 보여.”


유니가 고글을 리의 손에 건넸다.

리가 앞뒤로 뒤집어 가며 고글의 외형을 살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그냥 파란색이 아닌 걸 봤다? 그러면 냅다 도망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전투병이 아니니까. 사실 우리 일에서 파란색 이상을 만날 일도 거의 없고.”


천천히 고글을 써보는 리.

증강현실(AR) 기기처럼 투명한 스크린에 여러 가지 정보들이 나타났다.

유니를 바라보자, 유니의 실루엣에서 옅은 파란색 안개 같은 것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신기한지 고글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리.

뒤로 휙 돌다가, 그만 팔꿈치로 지나가는 관리자의 얼굴을 때려버렸다.


“악! 이 씨바라마가!”


얼굴은 얻어맞은 남자가 죽일 듯 달려들더니, 그대로 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엉거주춤 그의 손목을 맞잡는 리.


리의 왼쪽 소매가 내려가면서 팔뚝에 감긴 ‘아대’ 같은 게 드러났다.

아대 위로 ‘회전식 고리’ 같은 게 층층이 감겨 있었다.


“이 새끼가 되지고 싶어?”

“오매오매 우짜쓰까, 우짜쓰까, 오발탄선배, 참말로 죄송해라. 이기 오늘 새로 들어온 초짠디, 아직 똥오줌을 못 가려라. 한 번만 용서해 주소.”


일권이 얼른 달려가 오발탄의 손목을 붙잡으며 굽신거렸다.

오발탄이 일권을 얼굴과 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짜증스럽게 리를 뒤로 밀쳐 버렸다.


“까꿀이, 너도 짬 좀 찼나 보다. 쫄따구들이 하나 둘 느는 걸 보니. 근데 이런 것들로 니 복무기간이 줄긴 하겠냐. 하긴 니가 하는 일이 다 그따위지.”


‘퇫’, 턱을 만지작거리다 리쪽 바닥에 침을 뱉는 오발탄.

리의 어깨를 밀치면서 지나간다.


“초짜, 넌 내 눈에 띄지 마. 또 걸리면 턱주가리가 아작 날 줄 알아.”

“당연히 그래야지라. 선배요, 참말로 고맙소잉.”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하는 일권.

리의 머리도 눌러 억지로 인사하게 만들었다.

뒤에서 유니가 오발탄을 향해 혀를 비죽 내밀었다.


“워매, OJT 제대로 하는구만. 잘 들어 둬. 오발탄, 쩌 작자가 우리 환생 관리국 최악의 빌런이여. 어떤 식으로도 엮이지 말어. 원래 쩌 정도는 아녔는디, 복무기간이 얼마 안 남은 게, 승질이 개가 되아부렀어.”


사라지는 오발탄의 뒷모습을 보며 일권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발탄... 네. 근데, 선배, 복무기간이 뭐죠?”


리가 묻자, 일권이 이미 기가 다 빨린 듯 무표정한 얼굴로 리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하루가 참말로 기네. 아야, 지친다 인자. 자네가 쪼까 설명해 주소.”


털래털래 장비실을 빠져나가는 일권.

유니가 장비 쌕을 둘러매더니 리를 데리고 일권의 뒤를 쫓았다.


“기왕에 설명하는 거 처음부터 제대로 하자고. 환생계를 살던 영혼이 죽으면 여기 중간계로 와서 심판을 받게 돼. 중간계로 오는 와중에 영혼들은 오랫동안 심판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때 엄청 목이 마르게 되지.”

“망거주...”

“그래, 망거주. 기억이 좀 나나보지? 영혼들은 타는 목을 축이려 망거주를 마시게 돼. 말 그대로 과거를 잊는 술이지. 그때 자신과 관련된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잊는 거야. 기억을 잊는 편이 공정한 심판에 더 도움이 되거든.”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세 사람.

잠시 기다리자 예의 고양이 눈알 문이 이들 앞에 멈춰 섰다.


“판결국에선 환생의 삶을 평가해서, 영혼들을 ‘명천계’나 ‘암형계’로 보내. 환생계 용어로는 천국과 지옥 정도 되겠지.”


일권이 엘리베이터 속 거울을 보며 콧구멍을 잔뜩 넓혔다.

그러다 코털을 하나 뽑고는 아픈지 눈을 찡그렸다.


“근데 평가를 하다 보면 애매한 사람들이 나오거든. 명천계로 보내기도 그렇고 암형계로 보내기도 그런. 사건사고에 휩쓸려 제 명을 다 못살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환생시키는 거야. 본인이 원하는 장소에, 특수한 능력까지 줘가면서. 더 살고 와서 심판받으라는 의미지.”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니처럼 회색 상하의에 파란색 목도리를 둘러맨 관리사가 유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니가 밝게 웃으며 목례를 했다.


“간혹 이런 영혼들도 있어. 분명 착하게 살긴 살았는데 그렇다고 천계에 보내기엔 2% 부족한 영혼들 말야. 그런 영혼들은 이곳 중간계에서 일정 기간 환생 관리자로 일하면, 그걸 선업으로 인정해서 천계로 갈 수 있게 해 줘. 그걸 우리말로 ‘복무기간’이라고 하지.”

“아, 그렇다면 저도...”

“맞아, 리도 복무기간을 다 채우면 천계로 가는 거야. 어때, 죽이지?”


리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는 유니.

‘죽이긴 개뿔 뭐가 죽이냐’ 혼자 투덜거리며 1층 영혼 대기실로 들어서는 일권.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 파피루스를 내밀자, 명단을 잠시 들여다보던 관리자가 일권에게 ‘에메랄드빛 열쇠’를 건넸다.

돌아서며 ‘으흐흠’ 갑자기 목소리를 가다듬는 일권.


“에, 또, 영혼 번호 KTK1080A이신 분, 앞으로 나오시지요.”


일권이 사투리가 섞인 어설픈 표준어를 쓰자, 유니가 피식하고 웃었다.

10대 청소년으로 보이는 영혼 하나가 일어나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음, 뭐시기, 만화로 환생 희망하신 거 맞으시지요?”

“네.”

“음, 그라고, ‘환(換)’의 능력을 원하신 것도 맞지요?”

“환이요?”

“아따, 이거 저거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 안 있소.”

“아, 네, 맞아요.”

“네, 조씁니다.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복도를 빠져나와 환생관리국 건물 밖으로 나오는 네 사람.

어느덧 날이 저무는지 하늘에 거대한 둥근달이 떠있었고, 곳곳이 은은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가지 더, 만약 환생 관리자가 후배들을 키우면 그 기간만큼 복무기간을 줄여줘. 환생 관리자 업무를 원활히 전승하려는 일종의 묘수인 셈이지.”

“그게 묘수인지, 꼼수인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것네.”


일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니가 다가와 일권의 양 어깨를 주무르며 그를 달랬다.


잠시 뒤 ‘휘우웅’ 바람이 불더니, 건물 앞 활주로에 ‘사자 독수리’가 내려앉았다.

관리국에 들어서며 봤던 사자 얼굴의 독수리였다.


“벌써 ‘신시(오후 5~6시)’여. 깜깜해지기 전엔 돌아오게. 언능 가자고.”


사자 독수리에게 다가가자 마치 헬기처럼 몸통에 미닫이문이 생기더니, 옆으로 ‘드르륵’하고 열렸다.

일권 일행이 올라타자 ‘휘이익’ 휘파람 소리와 함께 독수리가 하늘로 훅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하늘 위에 떠오르자, 깃털로 만들어진 창밖으로 중간계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격자로 나뉜 일반 도시들과는 달리, 몇몇 커다란 건물을 중심으로 바큇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길들이 서로 물고 물리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도시 남쪽 끝, 회색 안개로부터 뻗어 나온 ‘용 모양의 길’은, 마치 고가도로처럼 중앙의 심판국까지 곧장 뻗어 있었다.

그 위로 길고 긴 영혼의 행렬이 이어졌다.


“자, 저기 하늘에 떠있는 거 보이지? 저기가 명천계야. 들어가는 입구는 동쪽 끝에 있는 저 커다란 문, 승천문이고.”


유니가 리 옆에 바짝 붙어 창밖을 가리켰다.

구름 위로 유럽식 성 같은 게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중간계 동쪽 끝에는 빌딩 만한 커다란 문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암형계는 반대편 서쪽 끝, 호수 속에 잠겨있어. 여기선 저렇게 입구만 보이지.”


고개를 돌리자 호수와 인접한 광장에 승천문과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문이 하나 더 보였다.

승천문과는 다르게 한자로 ‘형문’이라는 거대한 현판이 붙어있었다.


“승천문이나, 암형문이나 예전에나 사용했지 지금은 안 써. 형계나 천계로 바로 연결되는 포털이 심판국에 생겼거든. 뭐, 상징적으로 남겨둔 거지. 그리고 저기, 저 숲이 리가 주구장천 다니게 될 환생의 숲.”


유니의 손가락 끝으로 초록 줄기가 시원스레 하늘로 뻗은 대나무 숲이 보였다.

숲 초입에 ‘ㄷ’ 자가 옆으로 누운 빨간 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게 신기한지 리가 왼손 손가락을 들어 기둥을 따라 그렸다.


“참, 아까 보니 그쪽 팔뚝에 뭐 이상한 게 있던데. 그게 뭐야?”


유니가 리의 왼쪽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

손목 아래 팔뚝에 아대 같은 게 있었고, 그 위로 5개의 ‘회전식 자물쇠’가 주르륵 감겨있었다.


고리 위에는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었는데 중간계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아니었다.

‘뭐야, 자물쇠인가?’ 유니가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나도 기억이 잘...”

“자, 잡소리는 적당히덜 허고, 인자 내려강께 꽉들 붙들라고.”


허공을 한 바퀴 휭 돈 ‘사자 독수리’는 환생의 숲을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숲 입구 공터에 다가가자,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독수리가 일으킨 바람에 대나무 잎사귀들이 부딪히며 ‘쏴아아’ 파도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여가 환생의 숲이네.”


‘환생의 숲’이라 적힌 현판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는 네 사람.

좁은 길 양쪽으로 대나무가 빽빽이 자라 있었다.

대나무 숲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웃자란 대나무가 만든 터널 같은 길이, 네 사람의 앞으로 한참을 뻗어 있었다.


“살짝 음산하지? 난 올 때마다 왠지 으스스하더라고”


유니가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앞으로 혼자 다녀야 할 텡게, 익숙해 지드라고.”


선두에 선 일권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목 뒤로 어슴푸레 문신 같은 게 보였다.

어둡기도 하고 자꾸 움직여, 무슨 그림인지 명확지는 않았다.

그게 뭔지 보려 리가 고개를 쭉 내밀자, 유니가 웃으며 말했다.


“가방 때문에 그러지? 알아 나도. 아주 드러워 죽겠다니까. 깔끔한 장비 쌕 놔두고 왜 저런 거적때기를 매고 다니는지. 어울리지 않게 ‘애착 가방’이라나 뭐라나. 가끔 먹으라고 저기서 뭘 꺼내주는데, 냄새가 냄새가... 으 생각만 해도 토쏠려.”


유니가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때인지 기름때인지 모를 거무스름한 얼룩이, 일권의 진초록 배낭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자, 왔구만. 환생의 문!”


일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 1.5m 남짓의 좁은 길이 끝나고, 일행 앞으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대나무 숲으로 빙 둘러싸인, 커다란 돔 같은 공간이었다.


멈춰 선 일권 옆으로 나란히 서는 리.


‘오오!’ 리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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