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허지? 신기할 것이다.”
일권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장으로 들어선 일행의 맞은편에는, 10층은 족히 넘을 거대한 절벽이 좌우로 쫙 펼쳐져 있었다.
매끈하게 깎인 절벽 면에는,
하얀색 미닫이문이 위에서 아래로 주르륵 붙어있었는데,
그런 문의 행렬이 가로로 4줄 더 반복되었다.
위에서부터 네 갈래로 나뉘어 쏟아지는 폭포수가, 행렬들 사이에 경계를 그려주고 있었다.
문 중앙에는 문의 용도를 말해주기라도 하듯, ‘환(換)’이라는 글자가 거친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먼지 들어가겠다, 입 닫어. 놀라긴 아직 이르다구.”
유니가 팔꿈치로 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주머니를 뒤져 에메랄드빛 열쇠를 꺼낸 일권은, 광장 중앙에 홀로 세워진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보다 약간 큰 비석의 중간에는 자그마한 열쇠 구멍이 튀어나와 있었다.
열쇠를 꽂아 넣고는 잠시 리를 돌아보는 일권.
이제부터 재미난 일이 시작될 거라는 듯 양 눈썹을 치켜뜨더니, 이내 열쇠를 돌렸다.
그러자 순간, 5열로 나뉜 벽면 중 두 번째 벽이 ‘구구구궁’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오더니,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도박용 ‘슬롯머신’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전하는 벽에 튄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렇게 잠시 동안 돌던 벽은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하나의 문에서 멈췄다.
문틈 사이로 파란색 불빛이 새어 나왔다. 꼭 이것이 너희가 선택한 문이라 알려주듯이.
“자, 가보드라고.”
멈춰진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일권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우윳빛 막 같은 게 문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일행들을 돌아보며 따라오라고 손짓한 일권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문 속으로 뛰어들었다.
“자, 우리도 들어갑시다.”
등을 떠미는 유니의 성화에 못 이겨, 리도 문 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물속을 둥둥 떠다닌다든지,
막 허공에서 빙글빙글 돈다든지,
아니면 회오리 같은 것에 휘말려 어지럽게 날아가는 걸 예상했지만,
뜻밖에 주변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또 조용했다.
꼭 텅 빈 박물관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응?”
잔뜩 움츠린 채 천천히 실눈을 뜨는 리.
순간, 놀랍게도 주변의 색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흰 배경, 검은 윤곽선만 또렷한 세상이 눈앞에 쫙 펼쳐졌다.
구름도, 나무도, 시냇물도, 마을도, 오로지 ‘검정 선’으로만 이뤄진 세계였다.
“놀라긴 이르댔지?”
유니가 웃으며 말했다.
유니도 마찬가지로 색이 사라지고 검은 윤곽선만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유니가 팔을 벌린 채 리 앞에서 한 바퀴 휙 돌았다.
“신기하지, 여긴 만화책 속이야.”
“만화책?”
“그래 옛날 만화책. 환생은 꼭 인간계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만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신화든, 완결된 이야기라면 무엇으로도 할 수 있어. 최대한 희망 사항을 반영해 환생하는 거니까.”
“그만 덜 씨부리고 어여 알람이나 맞추랑게.”
어느새 다가온 일권이 레이어 워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자부터 30분이여. 30분 뒤믄 ‘세계의 저항’이 일어날텡게, 그전에 후딱 끝내 불더라고.”
“‘세계의 저항’?”
리가 유니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몸속의 백혈구 같은 거야.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물질을 공격해서 없애는 거지. 중간계 빼고는 대부분의 세계에 다 있는데, 나타나는 형태는 세계마다 달라.”
유니도 레이어 워치를 세팅하며 대답했다.
“쩌그 저 주막에 있는갑네.”
일권이 레이어 워치를 봤다가, 앞을 봤다가를 반복하더니, 길 아래쪽 초가지붕을 가리켰다.
리가 슬쩍 일권의 레이어 워치를 들여다보니, 2D 지도 위에 빨간 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네 사람.
주변에서 호미질하던 농사꾼들이 허리를 펴다 말고 흘깃흘깃 이들을 쳐다봤다.
초가집에 다가가자, 입구에는 ‘주막’이라 쓰인 ‘등’이 보였다.
식사 때가 지났는지, 주막 안쪽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주모, 여기 국밥 네 그릇만 말아주쑈~”
일권이 뒷짐을 지고 걸어가 초가집 툇마루 위, 나무 밥상 앞에 앉으며 소리쳤다.
리와 영혼도 엉거주춤 밥상 주위로 둘러앉았다.
리가 툇마루에 걸터앉자, 웬 강아지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리에게 다가왔다.
야생 동물에게라도 당했는지, 감긴 왼쪽 눈 위로 발톱 자국이 나 있었다.
“에구구. 어쩌다 눈이 이렇게 됐니.”
리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자, 강아지가 기분 좋다는 듯 리의 손에 머리를 비벼댔다.
“여기 주모!”
“아이고, 알았어라! 그 냥반 화통을 삶아 잡쉈나.”
치맛자락을 허리까지 올려 묶은 아낙네가 주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돌아서 소리쳤다.
놀란 리가 아랫입술을 내밀며 쭈뼛거리는 사이, 일권이 유니를 보며 턱으로 마당 중앙을 가리켰다.
삿갓을 쓴 남자 하나가 평상에서 혼자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위아래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옆에는, 기다란 검집이 놓여 있었다.
사발을 내려놓는 그의 손등에서 주르륵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곧 킥이 있을 거야?”
“킥?”
리가 강아지를 뒤로 물리며 물었다.
“영혼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열리는 거지. 누군가의 죽음처럼, 정신적 충격이 큰 사건 뒤에 생겨.”
“쉿! 목소리 낮추드라고.”
머리에 소쿠리를 이고 온 주모가, 일권 일행의 상 위에 짜증스럽게 국밥 네 그릇을 내려놓았다.
“꼬라지가 이 동네 양반들은 아닌 것 같고. 오널은 왜케 뜨내기들이 많댜. 국밥 값은 있쥬? 가리는 안 되는 거 알쥬?.”
“아, 예예.”
일권이 어색한 표정으로 주모에게 대답하는 순간, ‘쨍그랑!’ 사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자, 마당 중앙의 검객이 평상 위에 서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엔 길쭉한 나무 화살이 꽂혀 있었다.
‘휘이익!’ 재차 화살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검객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혔다.
다리가 뒤로 꺾이며 무릎을 꿇는 검객.
검객에 부딪힌 상이 엎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휘이익’ 세 번째 날아온 화살은 검집으로 쳐냈지만, 뒤이어 날아온 화살은 검객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헉!”
심장을 관통당한 검객은 맥없이 평상 아래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 잠시 움찔거리던 그는, 정신을 잃은 듯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 쓰러진 그의 입에서 ‘핑크빛 안개’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 나오기 시작했다.
“킥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일권. 유니도 벌떡 일어나더니 얼른 레이어 워치를 눌렀다. 그러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멈췄다.
놀란 주모도, 국밥을 먹던 농부도, 술을 마시던 한량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던 새조차도.
“앞으로 3분!”
일권이 환생할 영혼의 손을 붙잡더니 쓰러진 검객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검객을 똑바로 누인 뒤 영혼을 검객 쪽으로 당기자, 순간 영혼의 몸이 기체처럼 흩어지더니 핑크빛 안개와 뒤섞였다.
한동안 허공을 부유하던 기체는 이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검객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케이, 1단계 성공.”
기체가 완전히 빨려 들어가자, ‘반투명 고리’ 같은 게 나타나 검객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차곡차곡 감싸고 내려왔다.
마치 ‘미이라’를 천으로 감싸듯이.
동시에 ‘반투명 자물쇠’ 같은 것이 검객의 가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환생문을 열 때 썼던 에메랄드빛 열쇠를 다시 꺼내 드는 일권.
거침없이 자물쇠를 붙잡더니 바로 열쇠를 밀어 넣었다.
“저렇게 열쇠로 잠그면, 이 세계로의 환생이 완료되는 거야. 멈춰진 시간 동안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면 되고.”
일권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리.
유니가 레이어 워치를 보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45초. 그럭저럭 도망칠 시간은 되게... 어? 선배?”
유니가 일권을 보는데, 자물쇠를 붙잡은 일권이 뭐가 잘 안 되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선배,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왐마, 이, 이게. 이상허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물쇠를 붙잡고 낑낑거리는 일권.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데 잘 잠기지 않는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찌푸린 일권의 미간을 타고, 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선배! 뭐해요!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아따 쫌 가만있어 보드라고! 정신 사나워 죽겠응게.”
열쇠를 뺐다, 다시 넣었다, 이리저리 밀고 돌리고를 반복하는 일권.
어느새 일권의 목뒤가 벌게졌다.
“아, 씨, 일 꼬이는데...”
보다 못한 유니가 일권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덩달아 리도 유니를 뒤쫓았다.
“웬 쥐새끼들이냐!”
그때, ‘슈우웅’ 소리와 함께 멈춰진 세계가 일제히 풀리며 굵직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유니와 리는 동시에 고함이 날아든 쪽을 돌아다봤다.
쓰러진 검객과 똑같은 복장의 사내와,
큼지막한 철퇴를 어깨에 걸친 대머리 거한이 자신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뭐 거써, 배신자덜이지. 다 조져 불드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객이 검을 뽑아 들더니, 일권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놀란 유니가 얼른 일권의 앞을 가로막으며 레이어 워치를 눌렀다.
“풋!” 콧방귀를 뀐 검사는 타깃을 바꿔 유니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슈웅’ 소리와 함께 워치에서 1미터 크기의 ‘직사각형 돌벽’이 소환되더니, 유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챙!’ 돌벽에 부딪힌 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튕기자, 검객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니를 노려보는 검객.
“귀, 귀, 귀신이다!”
누군가 고함을 지르자, 지붕 위에 숨어있던 궁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유니를 향해 화살을 쐈다.
“화살!!”
리가 소리치자, 유니가 잽싸게 벽 방패를 좌우로 돌려가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았다.
몇몇 화살은 벽 방패를 피해 유니와 일권의 발밑에 꽂혔다.
“선배! 제발!”
그때, ‘쿵!’ 소리와 함께 유니의 몸이 허공을 날아가, 주막 담장에 처박혔다.
거한이 벽 방패를 향해 철퇴를 휘두른 것이었다.
“귀신, 그깟 거 별 거 아니구마.”
‘씨익’ 웃던 거한은 이번엔 일권의 머리를 향해 철퇴를 치켜들었다.
일권은 상황을 흘깃거리며 여전히 자물쇠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때, 리가 얼른 달려들어 거한의 두 팔목을 붙잡았다.
거한은 팔을 치켜든 채로 동작을 멈췄다.
‘힘 대 힘’으로 맞붙은 두 사람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왐마, 요 말라깽이가 제법이 구마.”
의외라는 듯, 거한이 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때 옆에 물러서 있던 검사가 허리를 숙인 채 미끄러지듯 다가와, 리의 왼쪽 허벅지를 베었다.
“크흑.”
리가 휘청거리자 바로 팔을 뿌리치고는, 그대로 리에게 철퇴를 날리는 거한.
리의 몸이 초가집 쪽으로 ‘부웅’ 날아가 처박혔다.
‘깨깽!’ 짝눈 강아지가 부딪혀 떨어지는 리의 몸에 그대로 깔려버렸다.
“에이, 장난치고 있었는디, 기냥 놔두쟤”
버둥거리며 간신히 얼굴을 바깥으로 빼내는 강아지.
비틀비틀 몇 걸음 걸어가더니, ‘픽’ 맥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아, 아...”
바닥에 모로 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리.
팔을 뻗어 강아지의 얼굴을 만져봤지만, 강아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강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리의 눈앞이 점점 부옇게 흐려졌다.
‘미스터 리!’
그때, 아득히 먼 곳에서 낮고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도 작아 마치 환청처럼 느껴졌다.
“자, 어서 정리하자. 방주께서 기다리신다.”
검사가 칼을 집어넣으며 말하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거한이 다시 일권을 향해 철퇴를 치켜들었다.
“그랴, 우선 이놈 대갈통부터 터뜨려 벌고.”
거한이 힘껏 철퇴를 내리치려는 찰나,
갑자기 ‘두두두두두’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사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여? 지진이여?”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한.
그때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의 몸 주위로 꼬물꼬물 옅은 아지랑이 같은 게 일고 있었고,
팔뚝에 감긴 ‘회전식 자물쇠’가 당장이라도 풀릴 듯 ‘덜커덕’ 거리고 있었다.
“말라깽이, 안즉 안 디진겨?”
거한이 머리 위로 철퇴를 휘휘 돌리며 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마중이라도 하듯, 리가 초가집의 툇마루를 느릿느릿 걸어 내려왔다.
고개를 들자, 검은 동공이 사라진 리의 눈에서 초록 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리! 미스터 리! 뭐 해, 도망치라고!”
유니가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리를 향해 소리 질렀다.
“삐삐삐삐삐!”
그때, 갑자기 유니의 레이어 워치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의 저항!”
순간, 유니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