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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환생 관리국

by 무딘

“그랴, 우선 이놈 대갈통부터 터뜨려 벌고.”


거한이 힘껏 ‘일권’을 향해 철퇴를 내리치려는 찰나, 갑자기 ‘두두두두두’ 지진이라도 난 듯 온 사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여? 지진이여?”


당황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한.

그때 정신을 잃었던 ‘미스터 리’가, 주막 툇마루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리의 팔뚝에 감긴 ‘회전식 자물쇠’가 당장이라도 풀릴 듯 ‘덜커덕’ 거리고 있었다.


“말라깽이, 안즉 안 디진겨?”


거한이 머리 위로 철퇴를 휘휘 돌리며 리를 향해 걸어갔다.

초가집을 내려오는 ‘미스터 리’의 눈에서, 초록 불빛이 불길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리! 미스터 리! 뭐 해, 도망치라고!”


유니가 벽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삐삐삐삐삐!”


그때, 갑자기 유니의 레이어 워치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



5시간 전.

사망한 영혼들이 모이는 ‘중간계’.


“자자, 어리버리들! 심판, 저거 다 속임수야. 내가 진실을 알려 줄 테니까, 내 말 좀 듣고 가! 이거 무시하다가 괜히 암형계 가서 죽도록 고생만 한다! 야, 너, 말라깽이! 그래, 너 말야 너. 이리 와봐!”


‘심판국’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영혼의 행렬 가운데, 젊은 청년 하나가 멈춰 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옆 광장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난쟁이에게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자,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난쟁이가 맞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고 손짓했다.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망설이는 청년.


“음마, 빨리 안 뛰고 뭣 허냐!”


그때, 누군가가 청년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청년이 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


“흐미, 이 오살노무 것. 도대체 ‘망거주(忘去酒)’ 월매나 처마셨길래 자꾸 이라는겨?”


갈색 조끼에 붉은색 벨트를 겹쳐 맨 웬 아저씨가, 인상을 쓰며 청년을 나무랐다.

그는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반가워. 나 일권이여. 완 빤치 쓰리강냉이, 일권!’이라며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아, 일권... 선배...”


청년의 혼잣말에 힐긋 째려보는 일권. ‘쯧쯧쯧’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그때, 늘어선 영혼들의 행렬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윽 나타났다가, 휙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왔다! 뛰어!”


줄지어 선 영혼들을 파고들며 뛰기 시작하는 일권. 청년도 엉겁결에 그를 따라 뛰었다.

‘아!’, ‘뭐야!’ 두 남자에 부딪힌 영혼들이 저마다 신경질을 냈다.


행렬의 앞으로 처마 지붕이 층층이 쌓인 커다란 한옥 건물이 보였다.

지붕 첨탑에서 푸른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하늘로 퍼져나갔다.


건물 정면에 놓인 스크린에선 ‘심판국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글자가 반복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자, 왼쪽!”


갈림길에서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키며 뛰는 일권.

슬쩍 고개를 돌려 영혼 행렬을 보는데, 검은 그림자도 이들을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에라이!”


다시 고개를 획 돌려 달리기 시작하는 일권.

뭔 일인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청년은 그의 등만 보고 뛰었다.

일권이 맨 진초록 배낭 위로, 그의 뒷목에 얼핏 문신 같은 게 보였다.


잠시 뒤, 그들의 앞으로 두꺼비 형상의 건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두꺼비가 ‘환생 관리국’이라 쓰인 현판을 짧은 팔로 붙들고 있었다.


“자, 다 왔당게!”


관리국 경내로 뛰어드는 두 사람.

들어와서 보니 15층이 넘는 제법 높은 건물이었다.


고개를 꺾어가며 건물을 올려다보자, 건물 상단의 두꺼비 눈이 ‘빙그르르’ 돌며 청년을 내려다봤다.


그때, 두꺼비의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 만한 커다란 새가 나타났다.

날개를 펄럭이며 속도를 줄인 새는, 건물 앞, 착륙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휘우웅’ 먼지바람이 일어 청년의 머리를 뒤 헝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줄이며 독수리를 바라보는 청년.

‘몸은 독수리인데 얼굴은 사자’인 새가 그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야, 뭐더냐! 언능 뛰라고!”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선 일권 선배가, 문을 반쯤 연 채 소리를 질렀다.


다시 허겁지겁 일권을 향해 뛰는 청년. 청년이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일권은 잽싸게 문을 닫더니 유리문 밖을 두리번거렸다.


‘쿵!’


그때 뭔가가 유리문으로 휙 날아와 부딪혔다.

자세히 보니 어린 오랑우탄이었다.


“끼아악, 꺅꺅꺅!”


손바닥으로 유리문을 ‘쿵쿵’ 내리치던 오랑우탄은, 입을 유리문에 가져다 대더니 ‘부우우’ 입바람을 불었다.


“아따, 하마 트믄 잡힐 뻔했시야. 저 시키는 왜 환생도 안 코 자꾸 나만 쫓아다니나 몰러. 아주 귀찮아 죽겄다니께. 나가 그리 좋은가?”

“니 가방이 좋은 거겠지. 더럽게 냄새나는 가방.”


그때, 짙은 회색 한복에 검은 도포를 걸친 청경이 다가와 일권의 옆에 섰다.

그의 눈에서 파란 레이저가 나오더니, 일권과 청년을 차례로 스캔했다.


“감찰반들은 왜 쩌놈을 안 잡는겨. 쩌거 눈치 보니라 나가 골치아파 죽겠당게.”

“하는 짓이 귀엽잖아. 그러니 니가 그냥 가방을 빨아.”


그때, ‘띵’ 소리와 함께 청년의 머리 위에 노란 물음표가 떴다.


“이, 새로 온 신입이여. 이름이 거 뭐시기, 미스터... 리? 그랴, 미스터 리. 무슨 나이트 삐끼도 아니고 이름하고는. 나가 후딱 올라가서 등록할랑게 그냥 거시기해주소!”


청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길을 터줬다.


“미스터... 리...”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뱉어보는 청년.

혀 위에서 겉도는 게 어쩐지 영 낯설었다.


일권이 그런 리의 등을 밀쳐가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 문 옆에 각 층의 안내도가 붙어있었다.


“앞으로 혼자서 다녀야 될 텡게, 잘 봐두라고. 1층엔 영혼을 선별하는 ‘정보부’ 허고, 환생 대기자들을 위한 ‘대기실’이 있어. ‘심판국’서 환생하기로 결정되믄 이 짝으로 영혼이 이송돼야.”


고개를 돌려 복도 쪽을 바라보는 리.

투명도를 약간 낮춘 그림처럼, 외형이 살짝 흐릿해진 사람들이 대기실이라 쓰인 방안을 말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2층에서 9층까지가 환생관리부. 2층은 식물계, 3층은 동물계, 4, 5층은 인간계 등으로 나뉘는디, 사실 말만 그라제 허벌나게 일이 많어서 그냥 이일 저일 다 해야 돼야.”


그때 고양이 눈알 모양의 엘리베이터 문이 위에서부터 쭉 내려와 멈췄다.

길쭉한 동공이 좌우로 찢어지더니 문이 열렸고, 일권과 똑같은 갈색 조끼 차림이 남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들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두 사람.


“우리는 9층. 특수 환생관리부. 니미럴, 말만 그럴듯하제 쌩 잡부여, 잡부. 10층부터는 감찰부하고 간부들, 사제들, 뭐 니가 몰라도 되는 양반들만 있는 곳잉께 신경 꺼불드라고.”


거울을 보며 턱을 문지르는 일권.

‘아따 수염이 겁나 자라부렀시야.’ 그의 뒤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미스터 리.


거울 속에는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의 남자가 어깨를 움츠린 채 서 있었다.

어색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보는 리.


“하여간 요샛것들은 면상만 번드르르 하지. 쯧쯧쯧. 몸이 저게 뭐 당가. 멸치새끼도 아니고.”


거울로 리를 흘깃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일권.

‘팅’, 옛날식 벨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훅 밀고 들어왔다.


“야, 빨리 출발 안 해!”

“아씨, 내 키 어디 있지?”

“썅, 어떤 새끼가 내 장비에 손댔어!”


흡사 대낮 경찰서를 연상시키는 분주한 사무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권과 똑같은 복장의 사내들이 몇몇은 서류를 작성하느라, 몇몇은 이야기를 하느라, 또 몇몇은 장비들을 걸쳐 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쪽 벽 전체를 가로지르는 ‘최후의 만찬’ 그림조차 왠지 어지럽게 느껴졌다.


T자 모양으로 주르륵 배치된 책상들을 지나치며 구석으로 향하는 일권과 리.

천정에 ‘특수환생부 14팀’이란 안내 표식이 있는 곳에서 일권이 멈춰 섰다.


“선배, 오셨어요.”


책상 뒤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했다.

금발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그녀는, 리를 보며 누구냐는 눈짓을 보냈다.


“누구 것냐. 니가 노래를 불러 싸던 후임 아니것냐.”


일권이 가방을 한쪽에 던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책상 주변에는 ‘창세사, 이승사, 암형사12선’ 등 각종 역사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오호! 드디어! 반가워, 반가워. 난 유니라고 해!”


호빵맨처럼 동글동글한 얼굴의 유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리가 어색하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 네, 저, 저는 미스터... 어, 그, 미스터...”

“리! 리! 리! 미스터 리라고! 미처 불겠구먼. 도대체 망거주를 월매나 처 마셔불믄 지 이름 하날 기억모단댜. 니 자체가 참말로 미스터리허다, 미스터리해.”


일권의 한숨에, 유니가 익숙하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리에게 웃어 보였다.


“원래 망거주가 전생을 잊게 하는 용도지만, 사람마다 작용하는 정도가 달라. 어떤 이들은 조금씩 기억이 남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미스터 리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 하기도 하고.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유니가 리의 의자를 뽑아주며 말했다.


“사람 챙겨준다고 그라고 생색을 내드만, 어서 저런 얼치기를 떠맡겨 불고. 아이고 두야. 나가 전생에 뭔 죄를 그라고 심하게 졌다고, 어이구 아부지.”


일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앉았다.

유니가 이해하라는 듯 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건너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띠링띠링!’


유니가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파티션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직사각형 팻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떡 일어났다.

‘게 모양 팻말’은 파티션 위를 뒤뚱뒤뚱 걸으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에요, 일. 띠링띠링. 일이 왔어요, 일이. 띠링띠링!”


동시에 벽면을 전체를 차지하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정사각형 격자로 나뉘더니 하나씩 뒤집어졌다.

검은 배경 위에 하얀 글자들이 하나씩 나타나며 ‘KTK1080A, 14팀, 만화’라는 글자가 완성됐다.


“워매, 징해분 거. 국장님요, 아직 이마에 땀도 안 말랐어라.”


입맛을 다시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일권.

유니가 게의 눈깔 부분을 누르자 팻말이 자리에 멈추며 조용해졌다.

아프다는 듯 유니를 향해 집게발을 철컥거렸다.


짜증스럽게 책상 위에서 둘둘 말린 파피루스를 하나를 집어 드는 일권.

막대 끝에 파란 불이 들어와 깜빡거리고 있었다.


고정 매듭을 풀고 끝부분을 쭉 잡아당기자, 중간 부분에 반투명 스크린이 드러났다.

그곳에 새로운 환생 대상자의 신상정보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으 인생이 이라고 슬픈디, 어디... 보세... 25세, 만화라고라.”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파피루스를 읽던 일권이, 파피루스를 다시 말아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유니와 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에효, 내 팔자가 그라지... 자, 가세.”

“다 같이요?”

“그랴, 어차피 OJT도 해야 쓴 게.”

“OJT요?”

“...”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와 유니.


파티션 위에 선 ‘게 팻말’이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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