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니가 혀봐. 첫 임무여.”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엉겁결에 파피루스를 받아 드는 리.
“리 혼자 괜찮겠어요?”
유니가 인상을 쓰며 일권을 째려봤다.
“뭐, 왜, 한 번 보여줬음 됐지, 뭘 더 가르친당가. 여가 무신 학교도 아니고, 지가 부딪혀 감서 배워야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리를 바라보는 유니. 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뭐, 괜찮아요. 복기도 여러 번 했고, 장비 교육도 여러 번 받은 걸요. 저 혼자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라제, 사내 맞구마. 역사물잉게 내용도 다 정해졌고 특별한 변수도 없을 것이네. 한 번 쭉 읽어보고 후딱 처리하소!”
엄지를 들어 보이며 격려하는 일권. 유니가 입을 비죽거렸다.
“아직 리 장비랑 캐비닛이 배정 안 됐으니까, 일단 공용 장비를 써. 뭔가 꼬인다 싶으면 고글의 ‘비상 연락 버튼’을 바로 누르고. 위치만 파악되면 여기서 바로 쫓아갈 수 있거든.”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는 리.
유니도 주먹을 맞쥐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실로 향하는 리.
크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괜찮겠죠?”
“다덜 한번 쓱은 넘어야 하는 산인 게. 믿자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역사책을 펴는 일권.
유니도 다시 서류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
배운 대로 장비를 챙기고 1층 ‘환생자 대기실’로 들어서는 리.
버스터미널 대합실 같은 곳에 영혼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리는 대각선으로 매는 ‘장비 쌕’이 어색해 연신 위치를 바꿔가며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데스크 유리 입구에 파피루스를 밀어 넣자, 심드렁한 표정의 관리인이 스윽 리를 올려다보더니 마이크를 입 앞으로 잡아당겼다.
“텅, 텅, 아, 아, 영혼 번호 BQ15520, BQ15520 앞으로 나오세요.”
리가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는데, 다들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나서는 이가 없었다.
“번호표 확인 안 합니까! 영혼 번호 BQ15520 앞으로 빨리 나와요. 바빠요!”
안내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몰아대자,
회색 망토를 머리까지 눌러쓴 영혼이 자신의 이름표를 보며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토 아래로 ‘뿔테 안경’이 반짝거렸다.
“으흐흠. 저, 조선시대, ‘강(强)의 능력’을 가지고 환생하시길 원하신 거 맞지요? 아, 여기서 ‘강의 능력’이라는 건 강력한 육체적 힘을 뜻하고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영혼.
“네, 그럼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짐짓 진중한 어투로 영혼에게 이야기하는 리.
영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시 한번 쌕을 고쳐 메고 대기실을 벗어나려는데, ‘텅, 텅’ 다시 마이크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어이, 열쇠 가져가야지!”
열쇠를 찾아 엉거주춤 데스크로 뛰어가는 리.
관리자가 ‘에메랄드빛 열쇠’를 내밀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 꺼꿀이, 아니 일권이 후배지? 열쇠 하나 제대로 못 잠그는 환생 관리자. 킥킥킥.”
데스크 안쪽에서 다른 관리자들이 함께 큭큭거렸다.
열쇠를 받아 들며 리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끼리끼리 모이는 거 아니겠어?’ 안쪽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휙 돌아서 버렸다.
“자, 가시죠.”
영혼을 앞세운 채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리.
뒤통수를 긁적이며 리와 영혼이 건물 출구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멀리 복도 끝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워 명확하진 않았지만, 사람의 실루엣이 분명했다.
리 일행이 떠나는 걸 끝까지 지켜본 검은 형체는, 뭔가를 얼굴에 걸치더니 측면의 버튼을 꾹 눌렀다.
‘뚜우, 뚜’
단조로운 통신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
‘쾅, 쾅, 쾅, 쾅!’
달궈진 철을 내려치는 날카로운 소음으로 가득한 대장간.
은빛 두건을 쓴 난쟁이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연신 망치를 내려치고 있었다.
집게로 철 덩어리를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난쟁이의 어깨를 톡톡 쳤다.
돌아보니 동료가 ‘뭉치 반장! 전화, 전화!’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사무실을 가리켰다.
철 덩어리를 내려놓고 사무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난쟁이.
사무실 문을 닫자, 날카로운 소음이 훨씬 줄어들었다.
“휴우우.”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난쟁이는 책상 위 반짝반짝 빛나는 원형 판을 눌렀다.
순간, ‘부웅’ 소리와 함께 사람 얼굴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지금 출발했어. ‘천계환(天界丸)’은?”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얼른 사무실 밖을 살피는 난쟁이.
다행히 일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촥!’ 커튼을 쳐서 사무실 안쪽을 가리는 난쟁이.
“왐마, 하루 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보낼 껴. 내 저녁쯤 숙소서 받게 해 줄랑께.”
“대기자가 더 있나?”
“어허허, 이 인간 ‘천계환’에 홀랑 빠져부렀구마. 뭐, 그만큼 중독적이긴 하지만서도, 이 사람아, 적당히 하라고. 많이 하다가 인생 조지는 수가 있응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고, 대기자가 더 있냐고.”
“요새 거가 장난이 아닌게벼. 환생하겄다는 이들이 천지 빼까리라데. 내 곧 연락 줄라니, 진득하니 좀 기다리드라고.”
그때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난쟁이가 얼른 홀로그램을 끊었다.
회색 두건을 쓴 또 다른 난쟁이가 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야, 너는 노크도 모르냐!”
“아, 죄송해요, 반장님. 근데 지금 ‘암형계’로 이어지는 길이 끊어졌다고, 당장 고치라고 부석공님께서 노발대발하셔서.”
“염감쟁이, 갈수록 승질이, 승질이. 알았당게, 내 바로 나갈라니, 장비나 좀 챙겨두소.”
“넵!”
고개를 끄덕이며 후배가 문을 닫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으로 다가간 난쟁이는, ‘탈칵’ 문의 걸쇠를 잠갔다.
커튼 사이로 잠시 창밖을 살핀 난쟁이는, 안전하다 싶었는지 자신의 책상으로 되돌아왔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그는, 책상 제일 아래쪽, 잠겨있는 서랍 하나를 열었다.
서랍 안쪽에 ‘구슬 주머니’ 같은 작은 천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주머니를 꺼내 들자, 주머니에서 은은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그 향기에 난쟁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킁킁, 이게 뭔 냄새지?”
한창 서류를 작성하던 유니가 인상을 쓰며 펜을 내려놓았다.
또 일권 때문인가 싶어 그를 쏘아보니, 일권은 뒤통수에 책을 덮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창가에 올려진 그의 진초록 가방은 가지런히 잠겨있었다.
“아씨, 신경성인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킁킁거리는 유니.
그러다 문득 뭐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종종걸음으로 장비실로 뛰어갔다.
“설마...”
14팀 공용 선반에서 장비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유니.
그러다 고글을 하나 집어 들고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뭘 가지고 간 거야, 얘는. 망가진 거?”
*
귀가 간지러운지 연신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는 리.
좁은 환생의 숲길을 통과해 나오자, 이내 탁 트인 광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문들이 종횡으로 나란히 박힌 10층 높이의 절벽은, 여전히 리에겐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벽을 바라보며 리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휴, 좋아, 열쇠를 집어넣으면 해당하는 환생문이 나타나는 거야. 어려울 거 없어.”
혼잣말을 하며 중앙에 세워진 회색 비석으로 다가가는 리.
에메랄드빛 열쇠를 구멍에 넣고는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구구구궁’ 둔중한 돌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세 번째 구획의 벽이 앞으로 나와 수직으로 돌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슬롯머신처럼 빠르게 회전하던 벽은, 천천히 속도가 줄더니 이내 하나의 문에서 멈췄다.
문틈으로 파란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케이! 자, 따라오시죠.”
열쇠를 쌕에 다시 집어넣고는 의기양양하게 문으로 다가가는 리.
문을 열자, 안에서 파란 막 같은 게 일렁이고 있었다.
“겁먹으실 것 없습니다. 들어가면 바로 환생의 세계니까요.”
리가 손짓하자 영혼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리도 영혼을 쫓아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떠나자, 역할을 마친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이 거의 끝까지 닫혔을 무렵, 불쑥 검은손이 나타나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
“우와, 달이 엄청 밝네요.”
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밤하늘에 뜬 달이 마치 조명처럼 환하게 대지를 비춰주고 있었다.
달빛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 지붕과, 조금 떨어져 이들을 내려다보는 한옥집이 보였다.
한옥집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담장이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게 방귀깨나 뀌는 권세가의 집처럼 보였다.
들어가는 입구도 돌계단을 수십 개 밟고 올라가야 해서, 마치 작은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좌의정 김종서’라... 참! 이거부터 해야지.”
얼른 손목의 레이어 워치를 꺼내는 리.
“자, ‘세계의 저항’이 일어나기까지 앞으로 30분. 타이머는 맞췄고. 여기 어디가 환생 예정지 같은데. 타깃은 어디 있나...”
타깃 검색 버튼을 누르자, 2D 지도가 나타나더니 그 위에 빨간 점이 표시됐다.
빨간 점은 점점 환생 예정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 오고 있네요. 저쪽에서 기다리시죠.”
길 한쪽의 나무숲으로 몸을 숨기는 리와 영혼.
마치 연극의 무대처럼, 달빛이 한옥 앞 흙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숨죽인 채 잠시 기다리자,
이내 회색 한복에 검은 갓을 쓴 노인을 필두로,
예닐곱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집 쪽으로 걸어왔다.
노인 뒤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허리춤에 긴 검을 차고 있었다.
‘푸후후후~’
노인 일행이 돌계단 중간쯤 올라섰을 무렵,
말 숨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이번엔 길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마치 노인 일행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밤늦게 마실이라도 다녀오셨소, 좌의정 대감.”
말 위에 앉은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노인이 계단 위에 멈춰 서며 남자를 돌아봤다.
놀란 그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붙잡았다.
얼른 손을 뻗어 호위병들을 제지하는 노인.
과연 좌의정 김종서답게 노인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수양대군께서야 말로 야심한 밤에 이 누추한 곳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렸다가, 집에 가는 길이외다.”
“어허허허, 그러시군요.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하고 가시겠습니까? 마침 좋은 이화주가 한 병 들어왔습니다만.”
‘푸후후훅’ 말이 고개를 흔들며 숨을 내쉬었다.
“이화주라. 좋습니다. 길고 긴 밤, 안 그래도 뭘 하며 보내나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하하하.”
웃으며 말에서 내린 수양대군은 노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수양대군의 경호원들이 멀찌감치 따라붙었다.
노인은 손짓으로 수하 한 명을 먼저 올려 보내곤, 수양대군을 맞으러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호위병들도 노인의 의도를 눈치챈 후,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4분의 일쯤 내려왔나, 뜬금없이 계단 옆 수풀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돌계단 위에 배를 깔고 누운 새끼 고양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인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이야옹, 이야옹’ 귀엽게 울어댔다.
“아이고, 이 녀석아. 어미는 어쩌고 얘서 이러고 있느냐. 밤에 혼자 돌아다니다간 늑대한테 잡아먹혀요.”
노인이 허리를 굽혀 새끼 고양이를 들여다봤다.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끄응 차!’ 기합 소리와 함께 계단 옆 수풀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철퇴를 하늘 위에서 한 바퀴 ‘부웅’ 돌린 그림자는, 그대로 노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으어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노인은,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계단 초입에 드러누웠다.
움푹 파인 노인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대감!”
놀란 노인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에 순식간에 벌집이 됐다.
피를 흘리며 하나 둘 맥없이 쓰러지는 호위병들.
“허허허, 그러게 줄을 잘 서셨어야죠, 이 양반아.”
수양대군이 쓰러진 노인의 발치까지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으으으으’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던 노인은, 이내 눈을 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순간, 노인의 입에서 ‘핑크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킥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리.
레이어 워치를 보니 ‘킥’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정지’ 버튼이 깜빡거렸다.
버튼을 누르자 ‘3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며 일제히 세상이 멈췄다.
“자, 갑시다!”
영혼의 팔을 잡아당기며 뛰기 시작하는 리.
달리면서 쌕을 열어 에메랄드빛 열쇠를 꺼냈다.
“자, 어려울 거 없어. 열쇠만, 열쇠만 잘 잠그면 되는 거야.”
혼잣말하며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가는 리.
노인의 입에서 핑크빛 기체가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둥둥 떠 있었다.
그 모습이 괴이했는지, 영혼이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서 쭈뼛거렸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시계를 보는 리.
시간이 빠르게 줄고 있었다.
“자, 시간 없어요! 어서요!”
오라고 아무리 손짓해도 요지부동 반응이 없자, 영혼의 뒤로 뛰어가는 리.
핑크빛 기체를 향해 영혼의 등을 떠밀었다.
“동작 그만!”
그때 벼락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돌풍이 불어닥쳤다.
돌풍에 휩쓸려 리와 영혼의 몸이 ‘부웅’ 허공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