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 그만!”
돌풍에 휩쓸려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리는, 길 한켠 나무에 부딪히며 간신히 멈췄다.
엉거주춤 엎드린 채 앞을 바라보는 리.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깜빡이자, 조금씩 시야가 진정됐다.
실눈을 뜨고 보니, 영혼도 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있었다.
휘청거리며 일어난 리는 비틀비틀 영혼에게 다가갔다.
영혼 옆에 무릎을 꿇고는, 천천히 영혼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영혼도 정신이 드는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동작 그만이라 했지!”
얼른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자,
남색 한복 위로 빨간색 두루마기를 덧대 입은 남자가, 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에 검은 줄까지 두른 게, 흡사 조선시대 포도대장처럼 보였다.
‘무슨 일 생기면 비상 연락 버튼부터 눌러!’
순간 유니의 목소리가 떠오른 리는, 허겁지겁 고글을 꺼내 썼다.
배운 대로 화면의 비상 연락 버튼을 찾았지만, 웬일인지 버튼은커녕 고글에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왜...”
리가 고글과 씨름하는 사이, 순식간에 사내가 리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풋’ 코웃음을 친 그는, 접은 부채로 리의 머리를 툭 쳤다.
“딱 봐도 고장 났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초짜.”
사내는 영혼 쪽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부채 끝으로 영혼의 모자를 벗겼다.
그러자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드러나 달빛에 반짝거렸다.
머리 때문에 그가 쓴 ‘뿔테 안경’이 더 검게 보였다.
‘촤악’ 다시 부채를 펼치는 사내. 부채 끝에서 파란 검기가 번뜩거렸다. 부채를 영혼의 목에 가져다 대자, 겁을 잔뜩 먹은 영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중간계 ‘감찰사’ 도일. 넌 일반 환생자들과는 에테르가 달라. 네가 환생의 숲에 들어설 때부터 내가 유심히 봤지. 너 암형계 ‘마물’ 맞지?”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영혼.
“아, 아니에요. 마, 마물이라뇨.”
“그럼 뭐냐고, 이 자식아!”
부채를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위협하는 도일.
검기에 닿은 영혼의 목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전, 전 천계, 천계에서 왔다고요.”
“뭐? 천계? 명천계?”
“네, 네, 그래요, 명천계요. 천계가 요새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환생 여행’을 할 수 있다길래...”
“환생 여행?”
도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천계환’만 두어 줌 구해주면 브로커가 원하는 삶으로 환생시켜 주거든요. 요새 천계 환경이 많이 나빠져서, 그게 암암리에 유행하고 있어요.”
부채를 ‘촤악’ 거두며 천천히 일어서는 도일.
팔짱을 낀 채 영혼을 내려다봤다. 이제 보니 영혼의 머리 뒤로 연한 하늘색의 ‘원형 고리’가 보였다.
‘명천계’ 영혼들의 상징이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한데. 쯧쯧쯧, 어이가 없구만. 천계씩이나 가서 ‘환생 여행’이라니. 다들 복에 겨워가지고.”
그때, 어디선가 ‘삐익, 삐익, 삐익’하고 알람이 울렸다.
순간 도일의 오른쪽 눈이 하얗게 변했다가, 그가 관자놀이를 누르자 원래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멈춘 시간도 끝났네. 자세한 건 감찰부로 가서 더 들어보자고.”
영혼의 팔을 잡아당겨 몸 전체를 어깨에 둘러메는 도일.
평범한 덩치에 비해 힘이 엄청났다.
“자네 일이니, 여긴 자네가 알아서 하시고. 그럼 바이바이, 초짜.”
도일이 능글맞게 윙크를 한 후 하늘로 뛰어오르자마자,
‘슈우웅’ 소리와 함께 멈췄던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장 위로 뛰어오른 도일은 한옥 지붕 위로 한 번 더 뛰어오르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게 웬 놈이냐!”
리가 얼른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자, 수양대군과 그의 호위병들이 잔뜩 성난 얼굴로 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밤에 웬 쥐새끼가 있구나. 잡아야겠지?”
“예! 대군!”
그때 ‘휘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리의 귀 옆으로 화살이 한 발이 스쳐 지나갔다.
얼른 자세를 낮춘 채, 나무 뒤로 숨는 리.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니, 무사들이 칼을 치켜든 채 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팍!’ 또 한 발의 화살이 얼굴 옆 나무에 꽂혔다.
“젠장, 도대체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고글을 던져버리곤 허겁지겁 레이어 워치를 만지작거리는 리.
그러다 ‘레이어 소환’ 메뉴를 보고는 얼른 ‘OK’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리의 앞으로 평판 TV 같은 얇은 직사각형 레이어가 소환됐다.
“죽어라! 이 쥐새끼!”
무사가 칼을 치켜든 채 나무 뒤를 봤는데, 놀랍게도 리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무사는 칼을 멈춘 채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리는 워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어로 앞을 가린 채, 행여 들킬세라 숨을 멈추고 있었다.
레이어가 순간적으로 주변과 유사한 장면을 재생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려주고 있었다.
‘가라, 제발, 가라고.’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되뇌는 리.
다른 검사들과 철퇴를 맨 거한도 뒤늦게 왔지만, 이들 역시 사라진 리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쥐새끼 같은 놈이구만. 싹 뒤져봐! 멀리는 못 갔을 테니.”
리를 남겨둔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무사들.
적들이 멀찌감치 떨어지자, 리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순간, 갑자기 워치에서 ‘삐삐삐삐삐!’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 젠장 하필...”
“저기다!”
다시 리 쪽으로 달려드는 무사들.
들켰다 싶자, 리는 레이어 소환을 해지한 채 마을 쪽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팍! 팍! 팍!’ 리가 지나간 발자국 위로 화살들이 내리 꽂혔다.
“잡아라!”
고함 소리를 뒤로 한 채, 마을 중심부를 향해 있는 힘껏 뛰는 리.
한참을 달리자, 마을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당산나무가 보였다.
당산나무 오른쪽 길이 산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산에 숨는 게 났겠다 싶었던 리가 당산나무를 끼고도는데, 순간 ‘촤르륵’ 뭔가가 리의 발목에 감겼다.
‘쿵’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는 리.
“크윽!”
얼른 몸을 일으켜 발을 보자, 바닥에서 뻗어 나온 뿌리 같은 게 리의 발목을 감고 있었다.
“뭐야 이건!”
뒤꿈치로 황급히 뿌리를 뜯어내는데, 순간 ‘구구구구’ 땅이 흔들리더니 당산나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땅바닥에서 나무뿌리가 거미줄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계의 저항은 나타나는 곳마다 달라!’
순간, 유니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젠장!”
벌떡 일어난 리가 뿌리를 피해 요리조리 뛰어가는데, 이번엔 커다란 나뭇가지가 리의 몸통을 붙잡으려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아슬아슬하게 가지를 피하는 리.
고개를 들자, 이번엔 산 쪽에서 커다란 나무들이 쿵쿵거리며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무의 몸통에는 어느덧 아귀 같은 입이 생겨, 뾰족한 이빨을 번뜩거리고 있었다.
“젠장, 저것들은 또...”
멈춰서 주위를 살피는데,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나무들이 리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심지어 강가에서도 작은 나무들이 이빨을 철컥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휘리릭!’
잠시 망설이는 찰나, 리의 두 다리에 다시 나무뿌리가 감겼다.
이번엔 저항할 수 없도록 허벅지부터 단단히 감더니, 훅 리를 당산나무 쪽으로 잡아당겼다.
“으아악!”
뒤로 넘어져 끌려가는 리.
뭐라도 잡으려 바닥을 휘저었지만, 손에 닿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속절없이 끌려오는 리를 보고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잡았다는 듯, 당산나무가 이빨을 철컥거렸다.
“안돼! 살려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리.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촥!’
그때, 어디선가 검은 형체가 불쑥 끼어들더니, 리를 묶은 나무뿌리를 단숨에 잘라냈다.
리의 몸이 관성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다 멈췄다.
“응?”
놀란 리가 얼른 상체를 일으키자, 포니테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팔꿈치까지 연결된 망토 위에 초록색 목도리를 두른, ‘여자 환생 관리자’의 복장이었다.
“유니... 선배?”
“리! 워치 위쪽 ‘빨간 버튼 두 개’, 빨간 버튼 두 개를 눌러!”
반가움도 잠시, 유니 선배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나무뿌리들을 연신 잘라내며 소리를 질렀다.
“쿠와아아앙!”
화가 난 듯 당산나무가 괴성을 지르더니, 뿌리가 그득한 발로 ‘쿵’ 발을 굴렀다.
그러자 땅바닥에서 고슴도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뭇가지를 뻗어 고슴도치들을 스윽 훑은 당산나무는, 유니를 향해 가지를 내리쳤다.
고슴도치들이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자, 마치 쇠못이 수백 개 박힌 몽둥이처럼 보였다.
“됐다!”
리가 빨간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누르자, 그들의 앞으로 타원형 비상 포털이 소환됐다.
“선배 됐어요! 비상 포털!”
“뛰어!”
‘쿵, 쿵’ 자신을 내리치는 가지를 요리조리 피해 포털로 뛰어드는 유니.
리도 그녀를 따라 얼른 포털로 뛰어들었다.
당산나무의 가지가 리의 발목에 다시 감겼지만, 포털이 ‘슈욱’ 사라지며 가지도 ‘댕강’ 잘려 버렸다.
*
‘쏴아아아!’
포탈에서 뛰어나오는 리와 유니.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이들을 반겼다.
서너 걸음 더 뛰다 천천히 멈추는 두 사람.
바닥에 털썩 엎드린 채, 숨을 헐떡거렸다.
“후우, 후우, 아슬아슬했어 정말. 너 하마터면 세계에 흡수될 뻔했다고.”
“휴우우. 고마워요, 선배. 비상 버튼이, 아니 고글이 이상하게 작동이 안 돼서...”
“들었어. 휴우, 도일이라고 괴짜 감찰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 비상 통신망으로 알려주더라. 네 위치랑, 고글 상태랑, 상황이랑.”
“아, 그 방해꾼 자식...”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유니.
하늘을 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네 잘못만은 아니야. 바빠서 나중에 고친다고 망가진 고글을 거기다 둔 나도 잘못이지. 아무튼 이만해서 다행이다.”
유니가 주저앉은 채 헐떡이는 리에게 다가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리.
“자, 좀 찜찜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너도 이제 정식으로 환생 관리자가 된 거야. 입봉을 축하한다, 미스터 리!”
‘씨익’ 어색하게 미소 짓는 리.
맞잡은 두 사람의 손위로 빛 한 줄기가 내리 꽂혔다.
‘치이익’ 리의 발목에 감겼던 나무뿌리가, 안개처럼 분해돼 허공으로 흩어졌다.
*****
1주일 후, 환생계.
“자, 곧 ‘킥’이 있을 거예요. 환생할 수 있는 틈이 열리는 거죠.”
갈색 조끼 차림의 ‘환생 관리자’가 영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긴장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앞을 주시하는 영혼.
그들 앞으로 옥상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선 여자가 보였다.
‘휘우웅’ 부는 바람에 허리까지 내려온 여자의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여자는 멀리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리다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여자의 몸이 허공을 향해 45도 정도 기울었을 무렵, 여자의 입에서 갑자기 연기 같은 ‘핑크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킥이다! 뜁시다!”
환생 관리자가 서둘러 ‘워치’를 누르자, 이들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일제히 정지했다.
바람도, 하늘을 날던 비행기도, 여자의 몸도, 그 모습 그대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영혼의 몸을 핑크빛 안개 쪽으로 밀자,
순간 영혼의 몸도 연기처럼 ‘화르륵’ 흩어지더니 여자의 핑크빛 안개와 뒤섞였다.
그리곤 서로 뒤엉키며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이내 누워있는 여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케이!”
안개가 여자의 입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자,
‘반투명한 원형 고리’들이 여자의 머리에서부터 차곡차곡 감겨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투명 자물쇠’ 같은 것이 여자의 가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관리자가 ‘에메랄드빛 열쇠’를 넣고 시계방향으로 돌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잠겼다.
“자, 그럼 즐거운 인생 되시길.”
열쇠를 위로 던졌다가 기분 좋게 낚아챈 환생 관리자는, 옥상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음, 흐음, 음’
허밍을 하며 옥상 철문을 잡아당기는데, 순간 거대한 ‘검은 형체’가 앞을 가로막았다.
“으익!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검은 형체를 살피는 환생 관리자.
덩치가 제법 큰 사람이었는데, 원시인이나 입을 듯한 ‘깃털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아마, 그가 막 문으로 나오려는 찰나, 세계가 멈춘 모양이었다.
“어휴, 놀래라.”
검은 형체의 옆구리 쪽, 빈 공간으로 슬쩍 빠져나가는 환생 관리자.
“에레이, 하마터면 망칠 뻔했잖아.”
마네킹처럼 굳은 ‘검은 형체’에 어깨를 ‘툭’ 부딪히는 환생 관리자.
씩 웃으며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음, 흠흠’ 다시 허밍을 하며 첫 번째 계단에 발을 내딛으려는데,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커헉!”
짐승 같은 신음을 내뱉는 환생 관리자.
고개를 숙여보니 뾰족한 칼끝이 그의 가슴팍을 뚫고 나와 있었다.
“크으윽, 이게....”
칼날이 뒤로 쭉 빠져나가자, 환생 관리자의 심장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의 뒤에서 칼날을 뽑은 검은 형체가, 혀로 칼날을 핥고 있었다.
가슴을 붙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지는 환생 관리자.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검은 형체는, 천천히 허리를 굽히더니 관리자의 손에서 ‘열쇠’를 뺏어 들었다.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던 그는, 느릿느릿 옥상을 향해 돌아섰다.
반투명 고리가 발목까지 감긴 여자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검은 형체.
피로 흥건한 그의 발자국 위로, 기다란 ‘회색 깃털’이 하나가 떨어져 바람에 흔들거렸다.
******
2개월 후, 환생계
바다 밑바닥 수북한 모래 위로, 서너 줄기의 햇빛이 레이저처럼 쏟아졌다.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햇빛도 덩달아 춤을 췄다.
꼬리를 휘휘 저으며 한가로이 햇빛 줄기를 타고 도는 물고기 한 마리.
새끼 새우를 쫓아 바닥으로 다가가는데, 순간, 모래가 벌떡 일어서더니 물고기를 덥석 깨물었다. 넙치였다.
넙치는 ‘와그작와그작’ 물고기를 뼈째 씹어먹었다.
행여 빼앗길세라 물고기를 물고 돌무더기로 이동하는데, 순간 ‘슈욱!’ 뭔가 감겨 물 위로 끌려 올라갔다.
이번엔 어부의 그물이었다.
그물 속에서 바둥거리는 넙치.
바둥거리다 그물 속 ‘석상’에 코를 부딪히며 정신을 잃었다.
“여엉차, 여엉차!”
섬에서 조금 떨어진 고기잡이 배 위.
세명의 선원들이 낑낑 거리며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있는 힘껏 그물을 당기자 ‘쿵’ 그물에 실린 넙치가 배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여, 꼴랑 이거여?”
“엄청 무겁더니만 넙치랑 피라미 한 마리? 제기랄.”
“저건 뭔데?”
그물로 다가가 딸려 온 석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선원.
‘지구본을 짊어진 근육질 사내’의 모형이었다.
오래 물속에 있었는지, 표면이 하얗게 삭아있었다.
“아틀라스의 석상인가...”
“아따 니 똑똑허다. 그런 것도 아냐.”
“에잉, 시작부터 재수 없게시리. 갔다 버려.”
그물을 열고 아령 크기의 석상을 붙잡는 선원.
들어 올리려다 손이 미끄러져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왁, 이거 엄청 무거운데?”
“에이, 새끼, 그러게 술 적당히 처먹으라고 했지? 다리가 다 풀려가지고. 쯧쯧쯧.”
쳐다보던 다른 선원이 혀를 차며 그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바다 위, 건너편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 저거 뭐야. 배 아냐?”
“배? 뭔 배? 좀 전까지 사방 백리 안에 우리밖에 없었는디?”
배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세 사람.
50m쯤 떨어진 곳에서 고기잡이배 한 척이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배는 마치 파도 따윈 없다는 듯,
아니면 공중을 떠다니기라도 한다는 듯,
아무런 미동도 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귀, 귀, 귀신인가...”
선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