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룡이 왔소! 어디 계시오! 부인!”
고함소리가 점점 커지나 싶더니, ‘챙’, ‘챙’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크아악!’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미부인! 자룡이 왔소! 부인! 어디 계시오!”
사내의 애타는 외침은 점점 가까워져, 이제 바로 옆, 담벼락 너머에서 들렸다.
“조공! 여기요! 조공!”
이쯤이면 안전하겠다 싶었는지, 담벼락에 기대 움츠리고 있던 여자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히히히힝!’ 말을 멈추는 소리에 이어, 중 갑옷을 입은 군인이 담장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부인!”
“조공!”
달려들어 미부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조자룡.
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옆구리에 박힌 화살이 치명적인 듯, 미부인은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해냈다.
“조공, 아두를, 아두를 부탁하오.”
조자룡은 한 손으로 아기 포대기를 부여안고,
다른 손으로 미부인의 팔을 어깨에 걸치며,
천천히 그녀를 일으켰다.
최대한 느리게 걸었지만, 미부인은 몇 걸음 못 가 우물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으흐흠. 아무래도 나는, 나는 힘들 것 같소. 어서 가시오, 조공. 아두를, 우리 아두를 부탁하오.”
“부인, 힘을 내셔야 합니다. 말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연신 팔로 조자룡을 밀쳐내는 미부인.
아무리 밀어내도 조자룡은 물러설 뜻이 없어 보였다.
가까스로 일어선 그녀는 다시 걸어보려 애썼지만,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재차 주저앉고 말았다.
옆구리를 붙든 채 힘겹게 심호흡을 하는 미부인.
그러다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조공! 적군!”
갑자기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조자룡은 바로 뒤돌아서며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적군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돌아서는데, 순간 미부인이 우물 속으로 뛰어드는 게 보였다.
“부인!”
뒤늦게 달려들어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옷깃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쿵’, 뒤이어 묵직한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망연자실한 채 우물 안을 내려다보는 조자룡.
그러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떨군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그때, 그의 입에서 핑크빛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킥이다! 자, 갑시다!”
건물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리는, 킥이 시작되자마자 워치의 ‘정지’ 버튼을 누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분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며 세상이 일제히 멈췄다.
능숙하게 다가가 조자룡을 바닥에 똑바로 눕히는 리.
영혼의 손을 이끌어 핑크빛 기체에 가져다 대자, 영혼의 몸도 안개처럼 흩어져 기체와 뒤섞였다.
“역시, 꼭 죽어야 킥이 시작되는 건 아니군.”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잣말하는 리.
안개가 다 빨려 들어가자, 투명한 고리가 마치 미이라처럼 머리에서부터 차곡차곡 감겼다.
동시에 반투명 자물쇠가 그의 가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잠그는 리.
‘철컥’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워치를 보니 아직도 60초 정도 남아있었다.
서둘러 집을 빠져나와 옆집으로 들어가는 리.
오래지 않아, 멈췄던 세상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기다리니, ‘이히히힝’ 말고삐를 당기는 소리와 ‘이랴!’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리로부터 멀어져 갔다.
“자, 이렇게 또 한 건 끝났고.”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순간 ‘따닥’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당으로 튀어나가는 리.
훈련한 대로 허겁지겁 고글을 꺼내 썼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루를 돌아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마루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별 호들갑스러운 인간 다 본다’는 듯 ‘냐아옹’하고 가만히 울어댔다.
고양이가 지날 때마다, 마루로 날아온 나뭇가지들이 ‘따닥’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으히, 놀래라.”
리는 고글을 벗어 이마에 걸친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쩝’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며 레이어 워치를 바라보는 리.
‘환생 완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발밑으로 언뜻 거뭇한 게 보였다.
“응?”
뭔가 싶어 발을 들어보는데, 아뿔싸, 찐득한 똥이 발바닥에 잔뜩 묻어 있었다.
마당 중간에 개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이, 똥을 싸질러놓은 거였다.
“으익, 더러워 진짜.”
짜증을 내며 연신 흙바닥에 신발을 문질러대는 리.
하다 잘 안되자, 계단 모서리로 다가가 신발 바닥을 긁었다.
“킁킁” 일권의 가방에서 나는 구린내가, 자신의 코 밑에서 나는 것 같았다.
“젠장, 소설계까지 들어와서...”
흙바닥이 움푹 파이도록 몇 번이고 발을 문지르는 리.
“경고! 경고! ‘비인가 환생 시도’ 감지! 경고! 경고!”
그때, 갑자기 레이어 워치에서 처음 듣는 경고 메시지가 들렸다.
“뭐? 비인가... 뭐?”
인상을 쓰며 워치의 ‘연결’ 버튼을 누르자, 거실 창 만한 커다란 레이어가 리의 앞으로 소환됐다.
‘레이어는 CCTV처럼 특정 장소를 비춰줄 수도 있고, 포털처럼 세계 내에서 순간 이동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어. 자, 봐봐.’
리의 등 뒤로 이어지는 레이어를 띄워놓고 장난스럽게 왔다 갔다 하던 유니의 모습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뭐야 저건...”
소환된 화면 속에는, 방금 환생시켰던 조자룡이 탁 트인 평원 위 진흙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곁으로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웅크린 채 앉아있었다.
‘코트남’의 어깨에선 사람의 팔이 아닌 반투명한 ‘보라색 팔’이 뻗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쓰러진 조자룡의 가슴을 파고 들어가 팔목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라색 팔을 움직일 때마다, 조자룡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순간 동작을 멈추더니, 코트남은 보라색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반투명한 자물쇠가 들려있었다. 영혼을 환생시키며 잠갔던 그 자물쇠였다.
“어! 저게 어떻게?”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리.
코트남은 이번엔 자신의 진짜 손으로 주머니에서 ‘에메랄드빛 열쇠’를 꺼내더니, 들고 있던 자물쇠에 밀어 넣었다.
그가 열쇠를 돌리자, ‘찰칵’ 소리와 함께 쓰러진 조자룡의 입에서 핑크빛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삐, 삐, 삐’
동시에 리의 워치에서 다시 ‘킥’을 알리는 알람이 빤짝거렸다.
‘잘 들어. 혹 문제가 생겨 영혼이 ‘환생체’ 속에서 안정되지 못하고 밀려 나오면, 얼른 다가가서 ‘형상 복원’을 시켜줘야 해.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세계 속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거야. 그럼 담당한 관리자도 징계를 피할 수 없어.’
순간 유니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젠장!”
얼른 이마의 고글을 제대로 고쳐 쓴 리는, 서너 걸음 물러섰다가 레이어 속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저리 비켜!”
평원으로 순간이동 하자마자, 리는 마치 럭비를 하듯 어깨로 코트남을 들이받았다.
갑자기 등 뒤에서부터 들이 받힌 코트남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바로 중심을 잡고 일어선 리는, 얼른 레이어 워치를 바라봤다.
‘휙휙’ 빠르게 화면을 돌려 ‘형상 복원’ 메뉴를 찾았다.
“제발... 제발...”
‘형상 복원, OK’ 버튼을 막 누르려는 찰나, 순간 리의 얼굴 옆이 환해지더니 엄청난 바람이 들이닥쳤다.
‘펑’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리의 몸이 ‘부웅’ 날아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펑! 펑! 펑!’ 연이어 리를 향해 주홍빛 불덩이들이 날아와 터졌다.
터질 때마다 리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에엥? 뭐지?”
코트남이 어느새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는 얼굴에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때, ‘슈우웅’ 소리와 함께 다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아아!’ 근처에 전투병들이 있었는지, 창을 앞세운 전투병 서넛이 고함을 지르며 코트남에게 달려들었다.
코트남이 그들을 향해 손을 휘젓자, 허공에 불덩이들이 생기더니, 전투병들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펑’, 불덩이에 맞은 전투병들은, 붉은 화염에 휩싸여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하나, 둘 쓰러졌다.
“뭐야, 잘 되잖아. 저놈은 뭔데.”
다시 리 쪽을 돌아보는 코트남.
리는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 있었다.
“경고! 암형계 B+이상 마물! 마물! 달아나시오! 달아나시오!’
리의 고글 여기저기에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코트남의 몸에서는 초록빛 에테르가 이글이글 일렁이고 있었다.
‘빨주노초파 무지개색 있지? 파란색이 제일 낮은 거야. 파란색 이상의 에테르가 보이면 무조건 도망쳐야 해. 우리는 그들의 상대가 안 되거든.’
유니의 경고가 떠올라, 워치의 비상 버튼을 더듬거리며 찾는 리.
쓰러진 조자룡의 입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아직도 저렇게 나오고 있는데...”
그때 코트남이 마치 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시 뚜벅뚜벅 쓰러진 조자룡에게 다가갔다.
환생체의 핑크빛 연기와 뒤섞였던 영혼의 연기는, 천천히 분리돼 한쪽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코트남이 그런 영혼의 연기를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휘휘 저었다.
순간 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만두지 못해!”
레이어 워치에서 ‘방패벽’을 소환한 리가, 고함을 지르며 코트남에게 달려들었다.
코트남은 ‘빙글’ 백 덤블링을 하며 뒤로 날아가, 리에게 다시 화염구를 던졌다.
‘펑, 펑, 펑, 펑, 펑’ 무려 다섯 차례나 화염구가 날아가 리의 방패벽에 부딪혔다.
그러자 ‘쩌적’ 리의 방패벽에 금이 가더니 소환이 풀려버렸고, 마지막 한 방은 그대로 리의 몸을 덮쳤다.
화염구에 맞은 리는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진짜 이상하네. 저놈은 왜 불이 안 붙지? 내가 너무 힘을 억눌렀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코트남이 ‘만세’ 자세로 팔을 들자, 입었던 코트가 쑤욱 벗겨졌다.
코트는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안팎이 뒤집어져 ‘회색 깃털’이 가득한 코트로 변했다.
깃털 코트는 천천히 내려와 남자의 어깨를 덮었다.
“어이, 방해꾼! 이제 제대로 놀아보자고.”
하늘로 붕 뛰어오른 코트남은 두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화염에 둘러싸인 커다란 망치가 그의 머리 위로 소환됐다.
그는 리를 향해 그대로 망치를 내리쳤다.
‘쿵!’ 커다란 망치에 맞은 바닥이 ‘쩌적!’ 갈라졌지만, 리는 몸을 옆으로 굴려 아슬아슬하게 망치를 피했다.
“하, 너, 진짜 이상한 놈이구나. 이것도 보인단 말이지?”
코트남이 오른손을 위로 들자, 땅바닥에서 붉은 뱀 같은 것들이 우르르 올라와 순식간에 리의 다리를 감았다.
리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번엔 팔과 목까지 빠르게 감싸버렸다.
바닥에 단단히 묶인 리는 하늘을 바라본 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까?”
다시 하늘로 뛰어오른 코트남은 리를 가슴을 향해 또다시 망치를 내려쳤다.
‘퍼억’ 그대로 망치를 얻어맞는 리.
‘우드득’ 갈비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고, ‘커헉’ 리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이야, 너 물건이구나. 이걸 맞고도 안 죽어? 최근에 만난 놈들 중에 니가 제일 딴딴하다.”
‘삐삐삐삐삐!’
그때, 세계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알람이 리의 워치에서 울렸다.
천천히 리쪽으로 다가온 코트남은 리의 오른팔에 채워진 워치를 발로 밟았다.
“뭐야, 시끄럽게시리.”
‘와그작’ 워치가 깨지며 알람이 꺼지자, 잠시 리를 내려다보는 코트남.
“스으읍, 어쩐지 낯이 익은데, 이 자식.”
한쪽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흥, 뭐면 어때. 어차피 죽을 놈인데.”
콧방귀를 뀌며 다시 하늘 위로 뛰어오르는 코트남.
손을 위로 치켜들자, 이번엔 커다란 검은 낫이 소환됐다.
“잘 가라, 이상한 놈.”
그는 리의 목을 겨냥해 그대로 낫을 내리그었다.
‘슈와아아악!’
그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커다란 창이 날아와 코트남을 덮쳤다. 놀란 코트남이 낫을 돌려 막았지만, 창이 가슴께를 스치며 그의 코트를 찢었다.
찢어진 그의 코트에서 ‘투둑’ 뭔가가 떨어졌다.
떨어진 덩어리가 ‘퉁’ 바닥을 튕겨 구르다, 리의 팔 옆에서 멈췄다.
희미해지는 리의 시야에 떨어진 물건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겉이 허옇게 삭아버린 어떤 ‘석상’이었다.
근육질 남자가 고통스럽게 지구본을 짊어지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