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귀, 귀신인가?”
다가오는 배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선원들.
“에, 에라이.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마러. 귀신은 무신...”
말과는 다르게 선원들의 낯빛은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인상을 쓰며 자세히 보니, 선수(船首)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여, 여, 여잔데? 처녀 귀신인가?”
“처녀 귀신?”
헛것을 봤다는 듯 연신 눈을 비비는 선원들.
눈을 깜빡이며 다시 보니, 여자가 아니라 회색 롱코트를 입은 사내가 선수에 한 발을 올린 채 서 있었다.
그는 얼굴에 기이한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보랑게, 귀신은 뭔 귀신이랴...”
배가 선원들 근처까지 다가오자, 가면남은 갑자기 머리 위로 손을 치켜들었다.
“뭐 하자는 겨, 시방.”
“인사하자는 건가?”
“이봐! 뭐, 문제라도 있어?”
선원 하나가 손을 고깔처럼 모아 소리 지르는 순간, 가면남이 치켜든 팔을 가로로 ‘휙’ 그었다.
그러자 하늘에 거대한 검은 낫이 생기더니, 선원들이 탄 배를 ‘부웅’ 갈랐다.
순식간에 가로로 두 동강 나는 선원들과 배. 선원들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잘린 배 윗부분은 천천히 미끄러져 바다에 ‘풍덩’ 빠졌다.
‘휙’ 뛰어올라 선원들의 배로 넘어오는 가면남.
피가 흥건한 갑판을 천천히 걸어가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방금 그물로 건져 올렸던 ‘석상’이었다.
석상을 들고는 ‘큭큭큭큭’ 음흉하게 웃는 가면남.
석상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볼 일을 마쳤다는 듯, 가면남은 ‘휙’ 뛰어올라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그가 떠난 발자국 위로 ‘회색 깃털’이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파도에 배가 기울자, 깃털도 핏물과 함께 주르륵 미끄러졌다.
*****
중간계, 이른 아침.
‘사자 독수리’ 객실 내부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리.
커다란 달 뒤에서 두 번째 태양이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었다.
햇볕이 달에 굴절되며 하늘에 떠 있는 ‘천계성’ 뒤로 옅은 무지개가 드리워졌다.
두꺼비 형상의 환생관리국 위를 ‘빙글’ 한 바퀴 돈 ‘사자 독수리’는, 날개를 펄럭거리며 착륙장에 내려앉았다.
독수리의 옆구리 문이 열리자, 장비 쌕의 위치를 고쳐 잡으며 리가 독수리에서 내렸다.
허벅지까지 이어진 갈색 조끼에 붉은색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맨, 환생 관리자의 복장이었다.
목에 하늘색 스카프도 둘러 나름 멋도 부렸다.
“여, 아침부터 고생허네. 인자, 슬슬 테가 나는구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일권이 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영혼이 곁에 있는 걸 보니, 일권도 환생의 숲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를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는 리.
“참, 전에 알아봐 달란 거 안 있는가.”
일권이 가방을 내려놓더니 가방에서 파피루스를 하나 꺼냈다.
예의 청국장 썩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서둘러 코를 막는 리.
“왜, 강아지 말이여. 지난번 OJT 가서 봤던. 찾느라 애 좀 먹었다니께, 유니한테 고맙다고 하소.”
일권이 내미는 파피루스를 받아 드는 리.
열어보니 OJT때 충돌했던 ‘짝눈 강아지’의 정보였다.
여차저차해서 다행히 명천계로 올라갔다는 내용이었다.
“아, 다행이군요.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했는데.”
“사내 맴이 그라고 여려가 워따 쓴단가. 쯧쯧쯧. 아무튼, 후딱 올라가 보소. 손님도 와있는 것 같든디.”
“손님이요? 저한테요?”
“그랴, 하등 도움이 안 되고 세상 귀찮은 인간.”
일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독수리에 올라탔다.
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관리국 건물로 뛰어갔다.
*
청소 용품이 가득한 어두운 창고 안.
둥그런 의자 위에 ‘검은 형체’가 앉아 있었다.
그는 무릎 위에 파피루스를 펼쳐 놓고는 열심히 글씨를 입력하고 있었다.
‘곧 출발 예정. 열쇠는 같은 곳에 두었다. 이번엔 방해꾼 따윈 없을 테니, 미리 와서 대기하도록.’
화면의 종이비행기 버튼을 누르자, 글자들이 안개처럼 일렁이며 흩어졌다.
천천히 파피루스를 접더니 허리춤에 끼는 검은 형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조끼 차림이었다.
그가 걸쇠를 풀고 문밖으로 나오는데, ‘후다닥’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막 사무실로 들어선 리였다.
리는 그의 코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검은 형체.
“아! 오발탄 선배!”
“이 새끼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누가 사무실에서 뛰어다니래?”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하는 리.
숙인 얼굴 아래로 혀를 ‘베’ 내밀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자꾸 눈에 거슬려. 그러다 언젠가 나한테 된통 당하는 수가 있어!”
오발탄이 리의 뒤통수를 때리자, 리가 아픈 듯 뒷머리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리를 향해 인상을 쓰며 오발탄은 흘깃흘깃 벽면의 전광판을 체크했다.
“재수 없을라니까, 꺼져!”
오발탄이 자기 자리를 향해 돌아서자, 리도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14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가며 보니 일권 책상에 이상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색 한복 위에 빨간 두루마기를 덧대 입고, 검은 줄로 허리를 동여맨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이, 오랜만이야, 초짜!”
순간, 부채로 리의 머리를 톡 치던 감찰사의 모습이, 부채를 흔들며 느끼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못생긴 얼굴, 더 못생기게 인상 쓰기는. 내 덕분에 실전 경험도 쌓고 좋았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죠. 덕분에 영원히 흡수될 뻔했죠.”
유니가 그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고생했어, 리. 누군지 기억나지?”
유니가 고갯짓으로 도일을 가리켰다.
“네, 기억나죠. 제 영혼 들고 도망쳤던 방해꾼. 저만 달랑 적진에 남겨둔 배신자.”
유니가 고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허, 배신자에 도망이라니. 중간계의 ‘대 감찰사 도일’을 뭘로 보고. 내가 조치한 덕분에 둘 다 살았으면서, 배은망덕한 종자들 같으니라고, 하하하.”
도일이 부채를 부치며 웃어댔다.
리가 책상에 장비 쌕을 툭 던져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심기가 불편한지 목덜미가 벌게져 있었다.
“그나저나 감찰사란 양반이 안 바빠요? 왜 여기 와서 죽치고 있는 건데.”
“그래요. 볼 일 없으시면 비켜주시죠. 일하는 데 영 방해 되네요.”
말수 적은 리가 쏘아붙이자, 유니가 의외라는 듯 ‘오호’ 입을 모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 인정머리 없는 양반들.”
왼팔을 쭉 펴더니 도포 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도일.
도포에서 ‘회색 깃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초짜, 자넨 이게 뭘로 보이나?”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곁눈질로 스윽 쳐다보는 리.
“깃털이군요. 사자 독수리 깃털 같은.”
“그날 환생의 숲에서 주었거든. 자네를 쫓아 환생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이야. 근데 이게 중간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깃털이 아니야.”
도일이 깃털의 끝부분을 잡고 손가락으로 ‘팽그르르’ 돌리자, ‘화르륵’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불타 없어졌다.
훅 풍기는 유황냄새에 리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암형계’에서나 볼 수 있는 깃털이지.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마물’이 이곳 중간계에 나타났다는 거야!”
‘에휴’ 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네, 그놈의 마물타령.”
“어이, 어이, 서운하게 시리 마물 타령이라니. 내가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이거야말로 빼박 증거...”
순간, 뭔가를 말하려다 멈추는 도일.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을 얹자, 오른쪽 눈이 잠시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케, 마물의 에테르가 감지됐어. 난 가봐야겠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일.
몇 걸음 가다 우뚝 멈추더니, 리에게 돌아와 리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특별히 알려주는 건데, 넉 달 동안 환생 관리자가 4명이나 실종됐어. 거기에서 매번 동일한 깃털이 발견됐다고. 내 추측건대, 마물이 초짜인 자네도 노리는 게 틀림없어. 몸조심하라고.”
리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도일.
그 느낌이 싫은지 리가 연신 어깨를 털어냈다.
“마물 어쩌고 저쩌고, 조심하라고 그러지? 신경 쓰지 마. 감찰계에서도 포기한 유명한 ‘마물충’이야. 중간계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마물이 나타나겠니. 쯧쯧쯧”
혀를 차며 다시 서류 더미에 고개를 파묻는 유니.
리도 서류철을 펼쳐 오늘 환생시킨 영혼의 정보를 정리했다.
‘초짜인 자네도 노리는 게 틀림없어. 몸조심하라고.’
도일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털어내는 리.
그때 ‘탁탁탁탁’ 소리와 함께 벽 전광판이 빠르게 바뀌었다.
‘KTK1130F, 14팀, 중국 역사 소설.’
꾸벅꾸벅 졸던 게 팻말이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일이야 일, 일이 왔어!’ 소리를 지르며 뒤뚱거렸다.
“아씨, 오늘 우리 팀만 벌써 몇 건째야. 우리가 아무리 시다바리 팀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아, 젠장, 어떡하지? 오전 중에 이 서류 다 보내기로 했는데...”
유니가 신경질적으로 게 눈알을 누르며 말했다.
게가 눈이 벌게져서 유니를 향해 집게발을 철컥거렸다.
“제가 하면 되죠. 선배.”
“어... 리가? 안 피곤하겠어?”
팔을 굽혀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리.
“뭐, 이 정도야 거뜬하죠. 아직 젊잖아요.”
“아, 진짜, 미안해 리. 이것들만 아니면 내가 처리하는데. 내가 다음번에 리 몫까지 처리해 줄게. 그럼, 부탁 좀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장비 쌕을 둘러매는 리.
일권의 자리에서 파란 불이 반짝이는 파피루스를 집어 들었다.
잠시 내용을 훑어보더니, 유니에게 ‘OK 사인’을 보내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사무실 한쪽 파티션 너머에서, 눈동자 하나가 그런 리의 뒤를 몰래 뒤쫓았다.
오발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리가 사라지자, 그가 ‘씨익’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
암형계. 마제(魔帝)의 방.
돔 같은 거대한 동굴 중간에, 중세 ‘왕의 의자’처럼 등이 높은 의자가 둥둥 떠 있었다.
해골 가면에 뼈다귀 갑옷을 입은 남자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파피루스를 읽고 있었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그의 망토가,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흔들거렸다.
‘으아아아악!’
죄인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마제시여, 마운님께서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검은 망토를 머리까지 눌러쓴 마물이 다가와, 마제의 앞에 무릎 꿇으며 말했다.
망토 밖으로 노란 뿔이 삐져나와 있었다.
“석상은?”
파피루스를 바닥에 던지며 마제가 물었다.
“지시하신 대로, 챙겨가셨다고 합니다. 헌데, 외람되오나 ‘세계의 저항’을 피하려고 환생까지 해가며 어렵게 찾은 석상을, 굳이 다시 가져가라 명하신 이유가...”
그때, 동굴 벽, 그림자 속에서 화염 덩어리가 ‘훅’ 날아와 마물의 눈앞에서 멈췄다.
화염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마물.
그림자 속에서 은빛 철갑을 두른 이가 반쯤 몸을 드러냈다.
그의 검 끝에서 붉은 화염이 이글거렸다.
“어딜, 감히...”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마물.
엎드린 채, ‘존명, 존명, 존명!’을 외쳤다.
마제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뚫린 구멍 사이로 붉은 하늘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
환생계, 중국 소설 안.
환생문을 열고 리와 영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장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제일 먼저 이들을 반겼다.
멀리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엉켜 들려왔다.
둘러보니 중국풍의 옛 시골 마을이었다.
지붕 곳곳엔 불화살이 박혀 불타고 있었고, 몇몇 집은 지붕 전체가 무너져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한창 전쟁 중인가 본데, 취향 참 특이하시네요. 굳이 이런 험한 곳에서 환생하시려 한다니.”
콧잔등을 찡그리며 영혼이 웃어 보였다.
“‘지(知)의 능력’을 가지고 환생하시던데, 뭐, ‘삼국통일’이라도 직접 해보시려고요?
“네, 그게 제 꿈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리.
“그렇군요. 자, 그럼 타깃을 찾아보시죠.”
리가 레이어 워치를 켜자, 2D 지도 위에 빨간색 타깃이 표시되었다.
그는 환생 예정지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케. 오고 있네요. 저 집이 예정지이니 일단 저기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리가 워치의 버튼을 누르자, 30분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
길바닥에 ‘장판파 서당’이라 쓰인 현판이 반쯤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집으로 다가가 무너진 담장을 넘어가니, 아담한 한옥 한 채와 우물 하나가 보였다.
호기심에 우물을 내려다보는 리.
물은 말랐는데 꽤나 깊이 파여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자, 이곳으로 올 테니, 일단 방 안에 숨자고요.”
방으로 들어가려 돌계단을 오르는데, 순간 ‘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른 돌아보니 웬 여인이 담장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 속에 아이를 감싸고 있었는데, 옆구리에 화살을 맞아 치마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학이 고급스럽게 수놓아진 게, 여염집 아낙네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이의 입을 막으며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리를 바라봤다.
리가 괜찮다는 듯 양손을 펼쳐 휘저었지만, 여인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건물 뒤로 가는 게 좋겠네요. 괜히 저 여자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서둘러 건물 뒤로 자리를 옮기는 두 사람.
막 몸을 숙이며 자리를 잡으려는 찰나, 멀리서 희미하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미부인! 조자룡이 왔소! 어디 계시오! 부인!”
순간,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