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5, 06회
05회에서 중요한 이벤트는 ‘계례(筓禮)식’인데요. 일종의 성인식을 의미합니다. 남자가 상투를 틀고 관모를 쓰는 의식을 ‘관례(冠禮)’라고 하듯, 여자도 계례를 통해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으며 비로소 성인으로 공식 인정을 받는 거죠.
계례식 예행연습을 하느라 계례 옷을 입고 머리를 올린 덕임을 보고 산이 놀라 뛰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할아버지 영조의 후궁이 되어 머리를 올린 줄 알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보통은 혼례를 올리면 머리를 올리잖아요. 그런데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15세를 전후해 계례식을 올렸습니다.
왕의 즉위식이나 혼례 같은 행사는 많이 보았어도 궁녀들의 계례식을 이렇게 자세하게 다룬 드라마는 처음인 듯해요. <옷소매 붉은 끝동>의 큰 매력이 바로 이 부분인데요. 지금까지 궁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사극은 많았지만, 궁녀 집단에 집중한 드라마는 없었거든요. 오늘은 궁녀즈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생각시? 항아님?
궁녀는 보통 6~7세쯤 궁궐에 들어갑니다. 이보다 더 어린 4세 때 들어가기도 하고, 늦게는 13세 때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궁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궁녀가 되는 건 아닌데요. 처음 이들을 부르는 호칭은 ‘생각시(애기나인 또는 견습나인이라고도 함)’입니다.
생각시는 일종의 ‘인턴 궁녀’라고 할 수 있어요. 계례를 치를 때까지 스승 상궁 밑에서 궁궐의 기본 예법과 글 등을 배우죠. 덕임이 스승 상궁인 서 상궁(장혜진) 곁에서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홍덕로가 덕임에게 ‘항아님’이라고 부르는 건 생각시를 존중해 높여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에요.
생각시는 궁의 7개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왕족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는 부서가 ‘지밀(至密)’이에요. 덕임은 글씨를 잘 쓰는 덕에 산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심부름을 하는 지밀나인으로 일하죠.
왕의 옷이나 이부자리, 병풍 등에 수를 놓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수방(繡房)’입니다. 수방과 비슷하게 왕족의 옷, 이불, 베개 등을 만드는 업무는 ‘침방(針房)’에서 담당했는데요. 덕임의 친구 ‘배가 경희(하율리)’가 바로 침방나인이었습니다. 궁녀즈가 모여 경희를 도와 함께 바느질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었죠.
왕과 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부서는 ‘세수간(洗手間)’이었습니다. 덕임의 친구 ‘김가 복연(이민지)’이 세수간나인이었죠. 지난 3회에서 필사한 책을 바치기 위해 영조를 만나러 가야 할 덕임이 복연을 붙잡고 영조의 심기를 묻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귀를 씻으셨다고, 전하의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며 정보를 주는데 세수간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빨래와 다림질 등은 ‘세답방(洗踏房)’에서 담당했습니다. 덕임의 친구 ‘손가 영희(이은샘)’가 세답방나인이었고요. 왕의 식사는 ‘소주방(燒廚房)’에서, 왕의 디저트는 ‘생과방(生果房)’에서 담당했죠.
현재 경복궁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해 왕족이 먹던 다과를 재현해 판매하는 ‘생과방’이란 이름의 카페를 운영 중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나 이산이 탕약을 마신 후 먹던 편강도 맛볼 수 있어요. 조선시대 왕족이 된 기분을 느끼며 한과나 차를 맛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운영하지 않으니 방문 전 꼭 확인하셔야 해요.
이들 부서 사이에도 업무의 특성상 격이 존재했는데요. 권력자를 가장 가까이서 돕는 지밀부서의 중요성이 가장 높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세수간, 세답방, 소주방, 생과방의 일이 매우 힘들었을 테고요.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보여준 <옷소매 붉은 끝동>
지금까지 많은 사극 드라마와 영화에서 궁녀들을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무시 받거나 잔심부름이나 하는 존재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오랜 시간 수련을 통해 성장한 궁녀는 궁궐 운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 공무원이었어요.
물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처럼 궁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거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음 왕을 선택한다는 설정은 실제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곳에 엄연히 있었지만, 마치 모두가 의식하지 않았던 궁녀란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게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과가 아닐까 해요.
조 상궁, 서 상궁으로만 불리던 그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늘 고개 숙인 채 서 있어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얼굴에 조명을 비춰준 드라마라는 점에서 저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참 좋았습니다.
이산은 어릴 때부터 정적(政敵), 그러니까 정치적인 경쟁자와 적들에게 심한 견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겪기도 하는데요. 이산이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에 당시 상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때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凶謀)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들려는 계략과 협박하려는 꾀가 날로 더욱 급박하게 이루어지니, 나는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흉도들이 내가 거처하는 집을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여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또한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
《존현각일기》, 1775년 윤10월 5일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던 이산은 이때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암살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예도 열심히 갈고 닦았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 이산의 삶은 참으로 힘겹고 외로웠을 듯해요.
겸손까지 계산하는 이산
06회에서는 이산이 활을 쏘는 장면이 있어요. 옆에서 덕로가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데도 모두 명중합니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가 재밌습니다.
홍덕로 : 저 화살은 빗나갈 줄 알았습니다. 늘 마지막 화살은 빗맞추셔서….
이산 : 생각 없이 쏘다 보니, 그만 다 맞춰버렸군.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했어.
이만한 스웩이 있을까요. 생각 없이 쏘아서 모두 명중이라니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에피소드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이산의 활솜씨는 대단했다 전합니다. 아래 기록을 잠깐 보겠습니다. ‘상’이 바로 정조 이산입니다.
상이 활을 쏘아 연거푸 명중시키고는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17692) 11월 26일
모조리 명중시킬 수도 있지만, 한 발쯤 일부러(?) 빗나가게 쏘고 그냥 49발만 맞췄다는 건데요. 산과 덕로가 대화를 나누던 저 장면은 위 기록을 보고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기록만 보자면 정조가 잘난 체하는 캐릭터로만 보일 수도 있어요. 위 기록이 적힌 이때 정조의 나이가 마흔. 당시로선 적은 나이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면에선 남들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대파들에게 ‘내가 이렇게 무예를 연마 중이니, 나를 함부로 해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일종의 엄포라고 할까요.
이산의 진짜 활솜씨는 09회에서 그려집니다. 능행에 나간 이산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이때 이산의 멋진 활쏘기를 볼 수 있죠.
다음 글에선 산이 덕임에게 반발자국쯤 다가가면서 주는 귀여운(?) 선물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05회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해 소개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덕임이 계례식이 열리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거죠. 중요한 계례식에 늦다니! 큰일이 났습니다. 궁녀 체면은 잊고 덕임과 서 상궁은 계례식 장소까지 부리나케 뛰어갑니다.
계례식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덕임이 도착하지 않아 궁녀 친구들은 걱정스럽습니다. 드디어 덕임과 서 상궁이 행사 장소에 헐레벌떡 들어와 자신들의 자리에 서는데요. 이때 덕임이 얼마나 급하게 뛰어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디테일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덕임의 신발입니다.
제조상궁 마마님도 모시고, 동료 궁녀들도 모두 참여해 진행하는 엄숙한 계례식이다보니 당연히 신발 한 켤레라도 정리정돈이 확실히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위 사진을 보면 덕임의 신발이 그만 삐뚤어진 모양으로 벗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덕임이 들어오기 전 행사장 모습은 어땠을까요?
계례식에 지각한 덕임의 자리만 비어 있습니다. 모든 궁녀들의 자세는 물론, 신발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고요. 위 두 사진은 언뜻 보면 같은 장면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다른그림찾기를 하듯 신발 모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신경 써 만든 <옷소매 붉은 끝동>의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 궁궐의 아름다운 산책 코스와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책 <궁궐 걷는 법>(이시우, 유유출판사)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