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07, 08회
04회에서 산은 ‘세심함’이라는 단어로 덕임의 마음을 살짝 흔들어 놓았습니다. 둘이 서 있던 바로 옆 애련지 연못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듯 말이죠. 07회에서 산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덕임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데요.
산은 궁중 온실에서 키웠다는 ‘감귤’을 먹지 않고 보관해뒀다가 덕임에게 몰래 줍니다. 과일 한 개로 마음을 전하려는 산의 모습이 귀엽게도, 로맨틱하게도 보이는데요. 그런데 감귤을 본 덕임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정색하며 거절을 하더라고요. 고작 감귤 하나뿐인데 말이죠.
조선시대 때 감귤은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니었어요. 감귤은 궁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에 올리는 과일이었습니다. 중요한 행사 때나 나오던 귀한 음식이었던 거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엔 먼 지방에서 재배한 과일이나 작물이 서울까지 오는 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조선시대 때는 달랐겠죠. 지금도 귤은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과일이잖아요.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서 재배한 과일을 궁궐이 있는 한양까지 갖고 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때 감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공을 세운 신하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왕이나 왕비가 선물로 내리는 과일이기도 했고, 심지어 감귤을 뇌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드라마 속 서 상궁이 어린 나인들이 감귤 하나 맛보겠다고 싸울지도 모른다며 미리 걱정을 했던 거죠. 그렇게 귀한 과일을 산이 덕임에게 건넨 겁니다. 마음에 둔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까요.
감귤에 담긴 진짜 마음
그런데 우리의 덕임! 산이 주는 그 귀한 감귤을 받지 않더라고요. ‘수라상에나 올릴 귀한 과일’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산의 마음이 서운할 수밖에요. ‘순순히 받고 기뻐하기만 하면 될 텐데’ 겨우 과일 하나를 두고 정색하는 덕임에게 괜히 화를 냅니다. 그럼에도 덕임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귀하고 과분해 처음부터 원치 않았으니’, 자신에게 감귤보다는 차라리 ‘사양할 자유’를 달라고 하면서요.
감귤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귤은 곧 상대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산은 감귤 하나를 건네며, 딱 이만큼 덕임에게 다가가고 싶었을 거예요. 덕임 역시 감귤을 받는다는 건 산의 마음을 그만큼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고요.
덕임이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던, ‘귀하고 과분해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대상은 감귤이 아니라 실은 왕세손 이산이라는 존재였을 겁니다. 그 마음을 받거나 거절하는 결정을 자신이 직접하고 싶었던 걸 테고요.
감귤을 주는 사람이 왕세손이 아니었다면 덕임은 그 귀한 과일 맛을 봤을지도 모르겠어요. 07회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산과 덕임의 밀당은 이어집니다. 때론 애틋하게, 때론 안타깝게 말이죠.
정조가 낚시하던 장소, 부용지
07회에는 궁궐 어딘가에서 이산과 영조가 나란히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바로 이곳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지’라는 연못입니다. 창덕궁 후원에 입장하면 처음 나오는 장소죠.
부용지는 사각형 모양의 연못 이름입니다. 이산과 영조가 낚싯대를 던져놓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연못 건너편에 정자 한 채가 잠깐 보이는데요. 이곳의 이름은 ‘부용정’이고요. 연못 한가운데에 떠 있는 원형 인공 섬도 잠깐 보입니다.
실제 이산은 왕이 된 후 신하들을 불러 후원에서 연회를 즐기기도 했는데요. 시를 짓는 놀이를 하곤 했대요. 이때 정조가 내준 시제(詩題)에 맞춰 시를 바로 짓지 못하는 신하에게는 연못 가운데 떠 있는 그 인공섬으로 잠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답니다.
이 벌칙을 받아 인공 섬으로 유배를 떠난 신하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도 있었다 해요. 정조가 내준 시제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 유명한 정약용도 시를 짓지 못했던 걸까요.
추위를 막기 위해 썼던 모자, 휘항의 등장
<옷소매 붉은 끝동>의 궁녀 중 박 상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출연 비중은 많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08회에서 박 상궁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이산에게 어떤 물건을 전하려 합니다. 그러다 제조상궁 조 씨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 상궁이 이산에게 전하려던 물건은 ‘휘항(揮項)’이었습니다.
휘항은 조선시대 남자들이 한겨울에 쓰던 모자입니다. 안쪽에 털가죽을 붙여 머리에 쓰면 체온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죠. 그런데 세답방에서 일하는 나이든 상궁이 왜 이산에게 휘항을 갖다 주려는 걸까요. 시간을 돌려 다시 ‘임오년의 그날’에 잠시 다녀와 볼게요.
당시 영조와 사도의 갈등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도는 내관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죠. 결국 역모를 저지르려 한다는 소문까지 영조의 귀에 들어가고 맙니다.
이대로 둘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 영조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는 아들 사도를 부릅니다. 사도는 이대로 아버지에게 가면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데요. 아내 혜경궁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학질이 걸렸다고 말씀드리려고 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
한여름이었던 이때 자신을 죽이려고 부르는 아버지에게 가서는 학질에 걸렸다는 꾀병이라도 부리려고 한겨울에 쓰는 휘항을 갖고 오라는 거였습니다. 자신의 휘항도 아닌,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는 손자 이산의 휘항을 가져오라고 한 건 혹시라도 그 휘항을 보고 손자를 생각해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사도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혜경궁은 아들 이산의 휘항이 아니라 사도세자 자신의 것을 쓰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내가 오늘 나가 죽을 터이니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는 심술을 알겠네!”
이것이 사도와 혜경궁이 나눈 마지막 대화입니다 이렇게 영조 앞에 불려 나간 사도는 그대로 뒤주에 갇히고 8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슬픔을 혜경궁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 만고에 나 같은 모진 목숨이 어디 있겠는가!”
위 대화는 모두 혜경궁이 직접 쓴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08회에 등장하는 박 상궁은 바로 사도세자의 보모상궁이었다는 설정으로 나옵니다.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견제 받으며 늘 추운 계절을 보내고 있을 이산을 감싸주기 위해 과거의 사도가 박 상궁의 손을 빌려 아들에게 휘항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요. 휘항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자만, 이후에 중요한 단서로 다시 나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는 내내, 그리고 드라마 속 궁궐을 소개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할 얘기가 무척 많은 드라마였어요. 덕분에 연말과 연초를 즐겁게 보냈고요.
<옷소매 붉은 끝동> 연재 글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해요. 나누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책자로 만들 계획입니다 :) 드라마에 나온 실제 장소를 찾아가는 ‘궁궐을 걷는 시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소식 전할게요. 그동안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옷소매 붉은 끝동> 연재는 마무리하지만, 궁궐의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소식을 전하는 포스팅은 계속 이어집니다. 기대해주세요!
※ 궁궐의 아름다운 산책 코스와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책 <궁궐 걷는 법>(이시우, 유유출판사)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