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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정 Sep 22. 2023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보고 친밀함을 추측한다. 연인의 경우 거리는 0이고 친하지 않은 경우 수십 cm가 된다. 길을 걸을 때 불편한 사람 곁으로는 안 가게 되고 혹시 걷다가 가까워지면 불편함이 느껴져 자리를 옮긴다.

 

직장에서 회식할 때 이러한 거리가 더욱 명확히 보인다. 보통 위가 낮을수록 자리의 끝자락에 앉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중앙에 앉는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높은 지위의 사람 옆자리는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다들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 피하기 때문이다.


직장 다닐 때 회식 때마다 '장'님의 옆자리는 항상 공석이라 그 자리를 보면 웃음이 나왔던 적이 많다. 서로 피하고 앉기 꺼려했는데 그래서 어떤 분은 회식 전 자리배치도를 미리 작성해 주시기도 했었다.


회식할 때 내 옆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이 없다면 내 지위가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배구선수 김연경도 어느 프로에서 회식 때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직장 생활도 생각나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타인과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데 꼭 집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최근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친정 갈 때 되지 않았어? 왜 친정 간다는 말 안 해?"


난 아기를 낳은 후 100일까지 친정에서 머물렀고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 일주일 정도 친정에 갔었다. 너무 자주 간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이제 친정 가서 3일 이상은 안돼."

"왜 안되는데?"


여동생과 아기와 3일간 동해로 여행을 다녀온 직후 남편은 대단한 결심을 한 사람처럼 나에게 말했었다.

"직장에서도 다들 그러더라고. 계속 그렇게 보내주면 습관 된다고. 이젠 친정 가도 2박 3일만 하고 와."


 남편이 완고하게 나오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한쪽이 강하게 나올 때는 한 발 물러서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게 친정에 가도 3일 정도 있다 왔다. 이후 아기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친정 가는 일은 많이 줄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안 가게 된 건데 남편이 먼저 친정 가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조만간 추석이잖아. 그때 갈 거니깐 가고 싶어도 참고 있었지."

"아니야. 추석 때 또 가면 되잖아. 다녀와."


나야 친정 가면 편하고 좋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열심히 짐을 챙겨 친정으로 향했다. 여동생에게 남편이 가라 그랬다고 하니 웃으면서 한마디 한다.

"형부가 많이 힘든가 보다. 휴식이 필요한 거야."

"그런가?"


내가 말이 많기도 하고 아기도 두 돌 때쯤 되니 계속 놀아달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지칠 만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번 토요일에 아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니 아기 데리고 병원 다녀오라고 한다. 셋이 다니는 걸 좋아하는 난 내심 서운한데 남편이 한마디 한다.

"집 청소 해놓을게. 진료 끝나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오고"

"아기 데리고 커피숍 가면 커피를 어떻게 마시냐? 네가 데리고 가봐."라고 말은 했지만 청소해 놓는다는 말에 좋아서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3시간 후 집으로 돌아가니 남편이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랑 아기가 많이 힘들었나?'

청소를 하면서도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내심 서운했다.


다음날도 교회를 가는데 늦는 걸 싫어하는 나와 천성이 느린 거북이 남편은 또 이런다.

"하은이 데리고 먼저 가. 난 청소하고 갈게."

천천히 간다면 싫어할까 봐 그런지 내가 좋아하는 '청소를 한다'는 말을 꼭 한다.

"알았어."

아기와 둘이 나와 교회로 향했다. 난 남편과 셋이 가고 싶은데 이럴 때는 좀 서운하다.


예배 후 팀모임 때 아는 집사님한테 남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나도 혼자서 청소하는 거 좋아해요. 나랑 성향이 비슷하네요. 나중에 하은이 좀 크면 남편 신경 쓰지 말고 둘이 놀러 다녀요."라고 하신다.


팀모임이 끝날 즈음 남편이 나타났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팀모임 끝났는데 이제 오냐?"

"청소할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집이 너무 지저분해."라고 말하지만 얼굴 표정은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건지.


이 일 후 급기야 나와 아기를 친정에 보낸 것이다. 서운함도 있지만 남편이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가 보다 라는생각이 들었다.    


난 가끔 이럴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린다.

'난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따뜻하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데인다'라고.

정말 맞는 말이다.


아무리 가족이고 남편이어도 거리가 필요하다. 남편의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나도 가끔 남편과 거리를 두고 싶을 때가 있으니깐.


친정에 며칠 다녀오니 남편의 짜증도 확 줄어들고 사이도 좋아졌다. 가끔씩 이렇게 거리를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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