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을 때까지 포기할 것
선택은 포기다
포기는 선택, 혹은 집중의 다른 표현이다. 무언가를 고른다는 건, 그리고 무언가에 빠져든다는 건 가능한 몇몇 세계에서 등을 돌린다는 걸 의미한다. 어지러이 얽힌 가능성의 가지를 다듬어 나에게 맞는 길을 더듬는 행위이기도 하다.
돌고 도는 자기 계발의 유행 속, 요즘 유독 돋보이는 키워드는 '포기'다. 끈기나 열정, 그릿, 존버정신(?)이 난립하는 시대에 참으로 경종을 울리는 단어가 아니겠는가. 다만 앞서 언급한 여러 삶의 태도 역시 유효하다. 포기를 말한다고 해서 '모든 걸' 내려놓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건강한(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포기는 철저한 자기 분석을 기초로 한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의미를 느끼고, 혹은 반대로 괴로운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조심스레 간택한 삶의 대안을 토대로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면 좋은 게 많다. 그렇다고 그 모든 걸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할 수도 없다. 삶의 영역을 교조적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지만 한편으로 어느 정도 선을 긋기도 해야 한다. 망망대해에서 하릴없이 표류하는 붕 뜬 기분이든 거대한 바위에 깔리는 답답한 상태이든 발길을 붙잡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어디까지 포기해야 하는가? 그건 재밌게도 무수한 포기와 단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경지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성취하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가운데 그나마 단단하게 발을 디딜만한 마른땅을 찾을 수 있다.
개개인이 가진 고유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이치이기도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지지 않은 방향성이 온전히 그 자신에게 귀속되기란 힘든 일이다.
이러한 자유는 축복이면서 저주이기도 하다. 자율성은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는 빗장을 열어젖히고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이면서, 그럼에도 모든 걸 확실히 얻을 순 없다는 한계이기도 하다.
자유 앞에서 느끼는 좌절은 이러한 이중성에서 기인한다. 세상 모든 걸 이룰 수 있으리라 속삭이며 높이 올렸다가도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며 돌아서곤 한다. 적절한 포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된다.
생각해 보면 포기만큼 주체적인 행위도 없다.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많은 변수가 있다. 소셜미디어든 부모님이든 사회적 압력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어떠한 선택이 순수하게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내 결정이 정말 '나'에게서 나왔느냐는 거다.
포기 역시 이러한 간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이 덜 하다. 일반적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여러 목소리는 무언가를 하라는 명령문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기란 그 명령을 거슬러 자신에게 맞는 길을 택하겠다는 선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