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er than career high
커리어에 관한 단일한 정의는 없는 듯 하나 누구나 동의하는 지점은 있다. 직업은 직장을 포함하고, 커리어는 직업을 포함한다는 도식관계.
직장 < 직업 < 커리어
직장과 직업을 헷갈리지 말라는 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발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수요가 있는 '직장'에 취업하여 일할 수 있다. 직업은 이처럼 특정한 업무 다발을 처리하기 위한 개인의 기술적 자격,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보상의 집합이다.
그렇다면 커리어는 직업과 어떻게 다를까? 일반적으로 직장, 혹은 직업이 하나의 점이라면 커리어는 그 점을 이은 선의 이미지에 가깝다. 특히 실무적으로는 특정한 직무에서의 지위나 실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직업적 여정을 커리어라 지칭한다. A 회사, B 회사, C 회사 등을 거쳐 마케터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직장은 고사하고 직업도 수시로 바뀌는 시대, 커리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커리어에 대한 조언을 요약하면 '공백기 없이 특정한 분야에 투신하여 업계의 정점을 찍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유 없는 공백기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삶의 궤적이 그 직무를 향해있어야 하고, 결국에는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말이다.
커리어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목표를 전제로 한다. 그게 CEO의 자리든, 연봉 1억이든 뭐든 간에. 그렇다면 직장, 나아가 직업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 시대, 특정한 직무에서 그러한 성취를 하겠다는 계획이 그대로 지켜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물론 누군가는 바늘구멍 같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어이 그 경지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못한다. 축구선수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 흔히 말하는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이는 지극히 소수다.
이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안정성, 먹고사니즘' 같은 경제적 보상에 근거한 소소함에 몸을 맡겨보면 어떨까? 일견 그럴 듯 하지만 여기에 '커리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일 이유가 있나 싶다. 일반적으로 커리어라는 단어를 대입하지 않는 공무직의 경우에는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럼 차라리 커리어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더 높은 차원에서 사고해 보자. 특정한 직무에서 정점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행동한다면 관점이 달라진다. 어차피 직업도 최소 5번 이상은 갈아치워야 할 텐데 공백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무조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질 필요가 있을까?
만약 인생의 가치를 '의미, 행복, 영향력' 등에 두고 있다면 앞서 언급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인생에는 그 자체로 정해진 이유가 없기에 스스로 의미를 세워야 하는 책임을 떠안는다. 흔히 말하는 커리어 하이(career high)에는 결국 자기 자신,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단단히 못 박아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잃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다고 커리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직업의 수명이 짧아졌지만 여전히 중단기적으로는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으며, 실제로 커리어에 투신해야 할 시기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다만 커리어는 어디까지나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그 수단에 너무 집착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