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고 난 자유를 얻었다
퇴사 관련 영상이나 블로그 글을 찾아보면 열에 아홉은 준비없이 퇴사하지 말라고 한다. 보통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같은 주옥같은 대사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환승 이직을 해라, 사이드잡의 수입이 월급을 넘어서면 그때 퇴사를 결정해라 등의 조언이 이어진다. 주로 안정성에 기반을 둔 해결책이다.
물론 안정성은 중요하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안정성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내가 굳이 나올 이유가 있을까?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완전히 망가져야만 퇴사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퇴사를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다.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걸 막을 근거는 없다.
이런 반항 섞인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나왔다가 결국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다는 간증이 줄을 이룬다. 퇴사하기 전 철저히 준비하라는 주장에 더 힘이 실린다. 그럼 준비가 될 때까지 계속 이 회사를 다니라고? 그게 언제지? 까마득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숨이 막힌다. 이대로 기한 없이 버티기만 해야 하나?
어느 날 멍하게 영상을 보던 중 말 한마디가 날아와 내 귀에 꽂힌다.
여러분, 퇴사가 곧 준비예요. 완벽히 준비하려고 하면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답정너다. 이미 내면에 답을 정해놓았고 그걸 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찾아 헤맨 건 답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답을 말해줄 사람이다. 퇴사라는 결론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저 대사 한마디는 마치 단비와 같았다.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다. 내가 항상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답. 퇴사가 준비다.
난 지금 워라밸이 유일한 복지인 회사에 다니고 있고, 집도 회사 바로 앞에 있다. 사이드잡이나 이직 준비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집에 와서 공부도 해보고 여러 시도를 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회사를 다니면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누군가는 본업을 놓지 않으면서 부업도 착실하게 챙겨가고, 몸값을 높여 이직에 성공하기도 한다. 뼈를 깎는 노력을 했거나 운이 좋은 경우다. 대부분은 실패한다. 온전히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이 주는 안정감이 부업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둘을 병행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무조건 성공하겠다며 퇴근 후에 힘을 쏟는다면 정작 본업에는 소홀하게 된다. 둘 다 잘해보려고 욕심을 부리면 몸과 마음이 축난다. 심신은 생각보다 연약하다. 잘 돌보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탈이 나고 만다. 내가 그랬다. 지금은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있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자체가 준비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두운 들판으로 냅다 던져지는 게 아니라, 여정을 떠나기 위해 이정표를 찾은 거니까. 생각도 확장된다. 퇴사 이후로 무한히 뻗어나간다. 그럼 아이러니하게도 퇴사 전까지 준비해야 할 것도 정해진다.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치의 생활비와 방향성이다. 퇴사를 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건 완벽한 청사진이나 다음 직장, 이미 충분한 수익을 내고 있는 사이드잡이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퇴사할 수 없다. 조금 더 허들을 낮춰보자.
생활비가 없으면 불안감이 커지고 삶을 이어갈 수 없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직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게 정확한 내 지출 규모를 아는 것이다. 얼마가 있어야 6개월에서 1년을 살 수 있을까? 자기가 얼마를 쓰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최소한 6개월 정도의 평균 지출내역을 알아야 퇴사 후의 삶에 대비할 수 있다. 만약 신용카드 할부와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최소한 다리에 밧줄이라도 묶거나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려야 한다.
지출내역을 알았다면 고정비를 줄이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매달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는 시간은 곧 끝난다. 추가적인 부수입이 없다면 생각보다 돈이 빠르게 줄어든다. 주머니에 여유가 없으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진다. 조급함에 무리수를 두거나 무너져버린다.
몸과 마음을 시급히 돌봐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소한 방향성은 잡고 회사를 나오자. 퇴사는 끝도 시작도 아니고 과정일 뿐이다. 모든 게 끝나지도 않고 바로 길이 열리지도 않는다. 퇴사는 준비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준비일까? 그건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거창하거나 구체적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방향을 알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내가 안착할 다음 장소를 찾아야 한다. 휴식이어도 좋고, 여행이어도 좋고, 원하는 공부여도 좋고, 사업이라도 좋다. 퇴사 후에도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진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찬찬히 탐색해보자. 어차피 준비는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니까 나오는 게 아니라, 완벽해지려고 나오는 거다. 내가 바라는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