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요함이 좋다
가끔 심리테스트 같은 곳에 나오는 '산이냐 바다냐'를 묻는다면 단연 산이다. 특히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이라면 더 좋다. 시끄러운 도시와도, 적막한 방 안과도 다른 공간. 황망하리만치 넓지만 이상하게 아찔하지 않다. 하늘 높이 솟은 고봉에 눈이라도 쌓여있으면 그만한 힐링이 없다. 그런 곳에서 무작정 걷고 싶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점유한 공간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된다. 면적으로만 치면 감옥에 있는 재소자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넓은 방을 배정받고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모두를 내려다본다. 가상의 정상에 서있다는 그 묘한 승리감을 위해 오늘도 누군가는 이를 악물고 회사를 다닌다.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그래야 하는지. 결론을 내렸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간 그 자리에서 내려다본들 내 위에는 여전히 다른 사람이 있다. 난 그런 구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어깨를 걸고 함께 걸을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발을 내딛는다. 애초에 난 고요함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다. 세상의 잡음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곳으로. 그럴 때마다 충만함이 내 안을 착실히 채워간다.
책 <위험한 과학책>에서 읽었던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역사상 가장 고립된, 즉 모든 인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한 우주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혼자서 조그마한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을 비행했다. 잠시 모든 통신이 끊기고 계기판의 불빛 외에는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아마 그 고요한 순간은 내향적인 이에게는 축복과도 같았을 거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하나같이 고요했다. 누군가는 시끌벅적하거나 극적인 사건에서 행복을 얻는다. 내게 행복이란 홀로 맞이하는 고요함에서 온다. 인도 판공 초 호수에서 명상을 하거나, 스페인의 시골마을에서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볼 때,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를 들으며 밤길을 걸을 때. 어지러이 흩날리던 마음의 먼지가 조용히 가라앉고 나서야 내 존재를 한껏 느낀다.
퇴사를 하고 날이 풀리면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마음도 있고, 뭔가에 도전하고픈 욕심도 있다. 하지만 실은 그저 조용히 걷고 싶다. 사무실에서 느끼지 못했던 그 고요함이 있어야 그때를 더 고맙게 생각할 것 같아서. 세상이 다시 괴롭히기 전에 조금은 쉬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