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도 남아도 힘들다면 그냥 나가련다
얼마 전 회사 동료와 커피 한잔을 했다. 연말쯤 퇴사를 하겠다고 하니 여기 다니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냐고 묻는다. 일과 사람 중 뭐가 더 힘드냐고 물어보면 거의 열에 아홉은 사람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 갑질 하는 고객, 나를 무시하는 후배 등. 사람은 세상만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다.
다만 조금 더 나의 고통을 구체화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나가더라도 사람 때문에 힘들어할 나날은 계속된다. 가정과 바깥 세상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또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난 일일이 간섭하는 사람이 참 힘들다. 주체성을 잡고 흔들며 내 행동을 제약하고 집어삼키는 사람.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난 내면이 한순간에 끓어오르는 경험을 한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 망정이지 표정도 쉽게 굳어버린다.
일 자체가 복잡하든 단순하든 힘들든 손쉽든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 내가 주인으로서 참여했는지, 아니면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만 했는 지다. 작은 일이라도 내가 직접 빚어내며 주인이 돼가는 과정. 그게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일의 모습이다. 퇴사를 결심하고 당장의 이직을 포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의 이상을 회사가 맞춰줄 수 없다면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하니까.
고통은 예민함에서 온다. 수용할 수 있는 자극의 정도를 넘어서면 고통이 된다. 그리고 예민한 사람은 그 문턱이 타인에 비해 낮다.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미묘한 예민함의 차이를 무시하고 거대한 프레스로 찍어 누르면 누군가는 반드시 큰 고통을 받는다. 남이 힘들어하는 모습에 공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동조할 이유는 없지만 최소한 남모를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다.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회사 바깥도 똑같다고 말한다.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객관적인 현실로만 놓고 보면 회사 밖이나 안이나 비슷하다. 어차피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엮이게 되고, 힘든 나날은 계속된다. 다만 적어도 고통을 선택할 자유는 있다고 믿는다. 또 사람마다 예민함의 정도가 다르기에 생기는 주관적인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매운 음식을 잘 먹는 이와 못 먹는 이가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예민함을 수용하는 태도는 배려로 이어진다. 그리고 때로는 뭔가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더 큰 배려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국의 황제가 살던 왕궁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 지역에서 길조로 여기는 새인지라 황제는 연회를 열고 고기와 술을 대접했다. 새는 구슬프게 울며 힘들어하다 결국 죽고 말았다. 상대를 위한다는 말로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저 지켜보는 게 더 낫기도 하다. 그래서 배려가 어렵다. 그 어려운걸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침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작정 침묵할 수 없다. 인생을 살며 동시에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사는 게 고통이라지만 최소한 어떤 고통을 받을지 선택해야 한다. 퇴사는 도피도, 회피도 아니다. 그저 한 고통에서 다른 고통으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과정일 뿐이다. 어딜 가나 힘들다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라면 난 차라리 내 발로 나가고 싶다.
사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니는 삶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사람에 치이고 조직의 논리에 치인다. 언제 해고를 당할지, 언제 부서이동을 할지, 언제 똑똑한 후배가 치고 올라올지 걱정해야 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도망치지 않아도 고통은 이어진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은 무인도를 탈출하기 위해 배를 만들고, <메이즈 러너>에서는 괴물이 우글거리는 미로 안을 달린다. 뒤에 남아있는 고통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25년간 대기업을 다니다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은 분이 있다. 회사 울타리 밖으로 나가니 명함도, 인맥도, 월급도 한순간에 끊겨버린다. 회사라는 시스템이 제공해주던 울타리가 영원할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수용 가능한 고통을 등에 지고 나를 지켜줄 나만의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 누군가 말했듯 변화는 변수가 아닌 상수다. 더구나 요즘은 그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피부로 느껴져 깜짝 놀랄 정도다. 10년 전, 아니 3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송길영 부사장은 이런 변화의 시점에 '현행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신념, 삶의 태도, 커리어를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이다. 20년 전 가장 각광받던 직업군에는 텔레마케터가 있었고, 10년 전에는 회계사였다. 지금 주목받는 현실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세상은 이미 한참 나아간 뒤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저녁 회식을 3차까지 이어가고, 신입사원 재롱잔치 워크숍을 펼치는 회사라면 어떨까? 물론 다닐 사람은 계속 다니겠지만 갈데가 있는 직원은 이직이나 퇴사를 결심한다. 능력 있는 핵심인재는 탈출을 꿈꾸고 여기 아니면 일할 곳이 없는 이들이 조직을 채워간다. 업무강도도 세고 소위 '꼰대'가 넘쳐나는 직장이라면 이런 현상은 더 가속화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지만, 중이 계속 떠나면 절도 유지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