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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쥐 Dec 07. 2021

밀가루 없는 디저트 만들기가 취미가 되면 생기는 일

작년 겨울 베이킹이라는 취미를 시작한 이후로 우리 집 광파오븐은 나를 위해 온갖 종류의 빵들을 구워주느라 참 바빴다.


최고 온도 200도까지 밖에 올라가지 않는, 사실은 전자레인지라고 불러야 더 가까운 광파오븐이지만 그래도 홈베이커로서의 입문을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어준 기특한 우리 집 주방 멤버다.


처음으로 만든 디저트는 대부분의 입문자들이 그렇듯 '노오븐 베이킹'으로 시작했는데 바로 티라미수였다. 마트에서 파는 레이디 핑거라는 과자를 사서 캡슐커피로 내린 에스프레소에 잔뜩 적신 후, 계란과 마스카포네 치즈, 그리고 설탕을 잘 섞어 레이어링을 해준 뒤 냉장고에 하룻밤 굳히면 Ready To Eat!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맛은 그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보다, 심지어 유럽에서 먹었던 것보다 맛있어서 하루 만에 커다란 락앤락 한 통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비운 - 그리고 동시에 몸무게도 눈을 깜빡 감아버리고 싶게 만든 - 나름 성공적인 첫 홈 디저트라는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그러다가 아토피가 심해지면서 극단적인 식단 조절에 들어가게 되었고 (밀가루, 육류, 유제품, 커피는 물론 마트나 바깥에서 파는 모든 가공식품을 1년 넘게 끊고 나는 자연인이다 수준의 식단을 유지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홈베이킹은 티라미수를 시작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강제 중단이 되었다.  


(밀가루를 끊게 된 사연은 아래 글을 참고해주세요!)


하루아침에 빵을 못 먹게 된 빵순이는 당연히 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착한 빵집'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베이커리들에서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은'이라고 홍보하며 파는 빵들은 대부분 계란이나 버터가 주재료였고 (ex. 쌀 카스텔라) , 또 반대로 비건 베이커리로 유명한 가게들은 '유기농' 또는 '국내산' 이긴 하지만 그래도 '밀가루'가 주재료를 주재료로 사용한 빵들을 팔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 오직 '현미가루' 또는 '쌀가루' 그리고 '콩'을 주로 사용하여 '노 밀가루' & '비건' 이중 조건을 만족시키는 베이커리들이 있긴 했지만 원재료를 살펴보면 뭔가 구매를 주저하게 만드는 (ex. 인도네시아산 팜유 - 물론 국내산/유럽산이나 미국산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소비자로서 뭔가 고퀄리티는 아닐 것 같다는 선입견이 강했다ㅠ) 요소들이 있었다. 대부분 콩비린내를 감추기 위해 초콜릿 맛이 나는 메뉴들을 많이 밀고 있었는데, 히스타민 레벨이 높은 음식 중에 초콜릿까지 포함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내 선택지에서는 아웃될 수밖에 없어다.


반대로 오직 '현미가루' 만을 사용했다고 하는 스콘은... 정말로 정직한 맛으로 디저트로 즐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건강식 그 자체라 사놓고 한동안 냉동실에 방치되기도 했다.



하지만 디저트에 대한 식탐과 집착은 절대 없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글루텐프리 #비건베이킹 이라는 신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해외에는 (주로 미국이나 유럽 쪽) 알러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고, 이에 따라 소수를 위한 '~제외' 식재료들과 레시피들이 꽤 다양하게 나온 상태였다. '비건'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이지만 보다 광범위하게 'Plant Based'라고 불리며, NO WHEAT, NO GLUTEN, NO EGG, NO MILK, NO DIARY, NO SOY 등등 아주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제품들이 많이 나와있었다. (우리나라도 점점 다양화되고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기껏해야 '무설탕' 정도만 대중화된 상황이었다.)

덕분에 블론디를 (초콜릿 없는 브라우니) 시작으로 오트, 아몬드, 코코넛 등을 활용한 스콘과 쿠키를 열심히 굽기 시작했다. 베이킹도 하면 할수록 점점 실력이 느는 분야이기에 성실하게 거의 1일 1 베이킹을 해나갔고 매일 아침 오늘은 뭘 만들어볼까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사실 전날 밤에 잠들기 전부터 다음날 만들 디저트를 미리 생각하곤 했다)


물론 먹기도 많이 먹었지만, 한 번 구우면 최소 9조각 이상은 나오는 디저트를 모두 처리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냉동실 한 구석에 나의 구움 과자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그다지 크지 않은 우리 집 키친 핏 냉동실은 만석이 되고 말았다. 그냥 만석도 아니고 출퇴근길 사람들로 꽉 차서 더 이상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구석에 있으면 출입문으로 나오기까지 험난한 상황이 연출되는 그런 지하철과 같은 만원 상태였다.


아이스크림은 유통기한이 없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쌓아간 냉동실에 대한 나의 무한 신뢰, 그리고 귀차니즘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나의 베이킹 실력이 올라갈수록 점점 맛있어지는 신상 쿠키/스콘에 밀려 예전에 구운 아이들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는 서랍 바닥으로 묻혀버리고 만지 오래였다. 소진 속도가 생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공급 과잉이 발생했고, 나의 소중한 홈베이킹 디저트들이 졸지에 장기 재고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문제가 점점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내가 다 먹을 거야. 내가 엄선한 좋은 재료만 넣고 만든것들이고 에어프라이어에 굽기만 하면 갓 구운 맛있는 빵들인데 이걸 버린다는 건 말이 안 되지'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텼다.


그러다가 간만에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온 날, 항상 그렇듯 최소 3개월은 버틸 수 있을 만큼 각종 냉장과 냉동식품을 잔뜩 사 오게 되었다. 냉동으로 된 관자, 새우, 연어, 혼합 야채, 블루베리 등 하나하나의 부피가 최소 맥북 수준이었기에 그냥 '냉동실 아무 데나 보이는 빈 공간에 쑤셔 넣기' 방식으로 넘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마음을 비우고, 3개월 이상 단 한 조각도 손을 대지 않은 스콘들은 버리기로 결정했다. 사실 손이 가지 않은 데는 나름의 이유들이 - 리코타 치즈/코코넛 가루/콩이 들어갔는데 유난히 이것들은 아토피 반응이 오는 느낌 -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내가 직접 공들여 구운 빵들을 버리는 행동을 합리화했다. 빵 외에도 음식을 남기는 일이 일절 없고, 혹시나 남는 경우에도 잘 남겼다가 다음 끼니까지 잘 해결해 온 (멀쩡한 걸 왜 버려!) 생활 습관을 가진 나에게는 꽤 어색한 경험이었다.


다행이게도 막상 버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무엇인가를 새로 베이킹할 때는 조금 더 고민을 하고, 레시피를 많이 찾아본 후에 정말로 맛있게 먹을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아직도 약 한 달 전쯤 구운 캐러멜 피칸 스콘과 콘치즈 스콘이 최소 일주일은 먹을만한 수준으로 남아있다. 그것들을 다 먹기 전까지는 잠시 베이킹 생활은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대신 매일매일 새로운 베이킹 영상들과 레시피를 찾아보며 저장과 스크린샷을 열심히 하면서.


재료 낭비 없는, 스마트한 식생활을 위해!



여기까지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집에서 해먹는 #홈쿡 #홈베이킹 식생활은 인스타그램 에도 공유하고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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