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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Oct 22. 2019

가을

추억의 다른 이름

싱그럽고 촉촉했던 나뭇잎이 영근다. 엽록소가 너무도 생생해 눈부셨던, 잎 자락 끝까지 뻗친 잎줄기마저 시퍼렇게 생생하던 여름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잎은 고개를 숙여 새벽바람과 찬이슬을 맞아 노랗게 물이 들었다. 가을이 오고 있는 듯하다.


때마다 가을은 내게 소식 없이 가버렸다. 작년 이맘때에는 그 좋다던 단풍구경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보내버렸다. 육아의 설움과 아비라는 버거움에 지쳐 가을의 뒷모습만 보았다. 잎새는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땅으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스산한 바람이 창틀 사이를 비집고 나의 발을 시리운다. 움츠린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치면 나는 가을의 인사를 받는다. 시리지만 무거운 가을 공기가 방바닥에 차분히 깔아 앉는다. 그렇게 나는 비 내린 어느 날, 나무 냄새가 정말 좋았던 그 날을 기억해본다.


가을은 추억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 해를 2개월 남짓 남긴 채 내년을 위한 희망과 올해가 남긴 아쉬움을 섞은 그 절반. 향기롭던 봄과 부산스러웠던 여름에 걸어둔 추억의 빨랫감들을 들춰보는 시간이다. 딱 그만큼 센티해지기도 한다.


간혹 가을은 노랫말에 주는 추억과 비슷하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탑골공원에서 흘러나오는 2000 년대 초반 가요를 듣고 있으면 청춘의 내 모습이 살아서 노래한다. 처음 마셔본 소주의 진한 알코올 냄새. 새벽 3시까지 살아있던 그 감성. 친구와 자취방에서 널브러졌던 그 몰골. 차디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그 시절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그렇듯 가을의 느낌은 내게 신선한 추억이다.


가을은 여김 없이 나를 찾지만 난 추억이 귀찮아질 나이가 되었다. 몇 년 동안은 손톱처럼 자라는 추억에 대해 악착같이 가위질을 해댔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 직장에 다니길 위해서 그렇게 수없이 가을들을 속절없이 보내버렸다. 두려운 미래와 현재의 애처로움이 긴급하게 날 재촉하던 그 시절. 새벽 공기 속에 시름을 담아 불어댔던 한숨이 뿌연 입김이 되어 가을 밤하늘에 흩어져버린 그 날들. 그마저도 내겐 추억이 되어버렸다.


사회에서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수록 나의 감성은 나무꾼이 베어놓은 참나무 장작처럼 건조하고 뻑뻑해졌다. 대답을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이례적인 인사치레와 같은 삶들을 이어나가며 옛날의 가을을 회상했다. 간혹, 캠핑을 다니고 불멍을 때리며 그 가을을 기억하려 노력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값진 시간들.


그 날의 추억을 함께했던 이들도 어느새 애아빠와 애엄마가 되었고 누군가는 서로의 안부를 묻기 어색할 정도로 자연스레 멀어져 갔다. 그들은 여전히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에 목숨을 걸고 있을 것이며 야박하게 스쳐가는 주말에는 가뿐 숨을 쉬며 주중의 피로를 잠으로 달랠 것이다. 그래도 가을이 왔으니 한 번쯤은 다시 그날로 돌려보고 싶다. 그간 안녕했는지, 잘 지냈는지, 지금도 여전히 나처럼 가을이 남긴 추억들을 가끔 기억하는지 되물어보고 싶다. 이번 해만큼은 가을의 뒷모습을 보며 보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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