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걸스 (2007.09.12)
네가 날 혹시 안 좋아할까 봐,
혼자 얼마나 애태웠는지 몰라.
그런데 네가 날 사랑한다니,
어머나! 다시 한번 말해봐.
드디어 대학생이 된 나는 죄책감 없이 만개하는 벚꽃을 마음껏 누렸다. 부산스러운 6월의 더위에도 난 행복해했다. 사소한 모든 것이 감사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갖가지 모양을 한 제품에 온갖 문장을 씌워대는 대학 전공 강의도 모두 흥미로웠다. 유명한 카피라이터의 글들은 성경구절처럼 달달 외우며 살았다. 사소한 모든 순간들을 기록하고 아끼며 살고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몸속에는 가을처럼 고유한 쓸쓸함과 외로움이 살아있었나보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새벽 2시가 되던 3시가 되던 난 밖으로 나가서 찬바람을 맞았다. 그냥 혼자 있는 그 공간이 싫었다. 탁 트인 공간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난 그렇게 연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동안 잊고 살던 연애에 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난 대학교 동기 Y에게 묘하고 찌릿한 설렘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간혹 그녀와 스칠 듯 말듯한 일상적인 접촉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때. 주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들을 싸이월드 일기장에서 배설하고 소화시켜야만 했었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어느 날 새벽, 그녀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함께 산책하자고 말했다. 오묘한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기로 했다. 기숙사 앞, 우산을 들고 그녀가 나왔다. 툭툭하며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하염없이 듣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난 우산을 접고 그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체온이 살짝 느껴질 법한 비좁은 공간. 빗소리에 섞여 쿵쿵 나대던 심장소리. 어느새 비 때문에 축축하게 젖어버린 왼쪽 내 어깨.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는 그녀. 아마도 그녀는 내가 하고자 했던 말들을 이미 예상했었나 보다. 난 그 마음에 용기를 얻어 그녀에게 고백했다.
"음... 오빠, 생각 좀 해볼게."
길고 길었던 침묵을 깨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내 진심이 덜 전해진 것 같아 말을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을 건낼 수 없었다. 그냥 친하게 지내던 동기이자 1살 많은 오빠였을텐데. 그녀에게 이 순간이 제법 먹먹하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기숙사에 들어와 한참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용기 내서 고백했으니 후회는 없다. 자세를 반대로 바꿔 누우며 생각했다.
삼일이 지나도 그녀에게 대답이 없다. 동아리 활동으로 간혹 얼굴을 마주할 때도 그녀는 나를 피했다. 간혹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무리했구나, 다른 변명거리를 찾아야 하나? 사람들에게 실망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녀에게 밝게 인사를 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에도 크게 웃었다. 내 자존심이 다시 구겨질까 봐 필요 이상의 술자리를 놀러 다녔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였다. 뭐지? 내가 말실수를 했나? 너무 태연하게 돌아다녔나? 괜히 밝게 인사를 했나? 너무 웃고 다녔나? 삽시간 온갖 생각이 튀어나와서 머리를 하얗게 마비시켰다. 쿵쾅대는 가슴을 잠시 눌러 진정시킨 채로 조용히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어... 왜?"
"오빠. 잠깐 같이 산책할 수 있을까?"
"아 지금? 어... 어 바로 나갈게."
"응... 그때 거기로 나오면 좋겠어."
저번처럼 비가 오지 않았던 새벽.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 그때처럼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길을 걸었다. 일말의 기대감, 그리고 거절에 대한 상실감이 뒤엉킨 채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바랬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라.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승낙해주면 더없이 좋을 것이며 거절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때의 감정을 숨겨버릴까? 그냥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문득 뱉어낸 말들이라고 멋쩍게 웃어넘길까? 공허한 무중력 공간에 남겨진 느낌이 들던 찰나에 말이 없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였다.
"오빠, 내가 생각해봤는데.. 나도 사실 오빠가 좋았어."
"갑자기 오빠가 그런 말을 해버리니까, 그냥... 우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나의 감정이 우주 저너머 끝으로 증발하지 않고 이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전해진 진심을 보상받을 수 있어서 고맙다. 반짝이는 눈으로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 해는 원더걸스 <Tell me>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학교 축제, MT 댄스무대는 그 노래가 모두 점령했다. 고백의 결실을 맺은 9월에, 난 원 없이 그 노래를 들었다. 내 손바닥에 그녀의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행복했다. 풋풋한 첫 연애의 시작. 부끄러움이 많았던 우리는 서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교묘하게 연결된 마음의 고리가 걸려있는 채로 한없이 달그락거렸다. 그녀 덕분에 계절의 변화에 따른 사사로운 풍경들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온화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난 군대에 입대했다. 진득하고 깊은 스킨십과 별다른 추억거리도 없이 한 해 몇 달만을 그녀와 함께 보낸 채로 무책임하게 군대로 떠났다. 아무런 고민 없이 이기적으로 그녀에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향후 2년이 넘도록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휴가를 나오면 연락하겠다는 말, 자주 전화하겠다는 말, 잘 지내라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수많은 말들을 그녀에게 전하면서 나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