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지는 모르겠습니다
"괜히 샀네. 돈만 아깝게"
스무살의 2월, 막 재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그 때, 한창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던 철봉 광고를 보고 부모님을 조르던 것이 첫 기억이다. 딥스가 뭔지, 풀업이 뭔지도 잘 모르지만, 일단 사면 몸이 멋있어진다는 말에 2주 동안 부모님을 설득했고, 결국 치닝디핑이 마루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2시간의 설치과정 끝에 처음 턱걸이를 당겼을 때의 그 좌절감이란. 결국 그 뒤로 한 달 동안 1개도 올라가지 못하고 어머니로부터 핀잔만 듣게 되었다.
마른게 싫었다. 공학이었던 중학생 때는 이유도 없이 지나가다 맞아도 그냥 괜찮은척 지나가기 일쑤였다. 키가 작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마른 상체에, 교복 바지는 통이 너무 커서 두바퀴는 감을 수 있었다. 이른바 일진놀이를 즐기던 친구들에게 멸치라고 모욕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 때마다 마른 몸이 증오스러웠다. 왜 저 새끼들은 운동도 안하고 먹기만 해도 몸이 커지는데 나는 그대로인가. 다행히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학교 폭력의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마른 몸이 싫었다. 고등학교 때 학교 조끼를 입지 않고, 위에 니트류를 입는게 나름의 유행이었다. 니트를 사러 백화점에 가서 'S 사이즈가 나오지 않는다', '니트를 입으면 더 말라보인다'는 남자 점원의 말과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수치심도.
운동에 대한 지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사람은 운동을 해야 살이 찐다는 것도, 영양소를 골고루 많이 먹어야하는다는 것도, 아예 관련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일단 턱걸이 바를 샀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재수학원에서 집을 오가는 시간에 아버지 핸드폰으로 운동 관련 정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암스트롱 풀업 루틴, 어플로 하는 루틴, 힘콩 루틴 등 안해본게 없었다.
다행히 원체 마른 몸이라 한 달이 지나니 1,2개는 쉽게 올라가더라. 물론 자세는 엉망이지만. 밥도 최선을 다해서 먹었다. 하루종일 앉아있어야 하는 재수생의 특성상 많이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냥 간식이든 뭐든 최선을 다해서 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에 살이 점점 붙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나 엉성한 자세로 풀업 8개 정도를 당기게 되었을 때는, 이미 1~2kg 정도가 붙은 상태였다. 원래 입던 S,M 사이즈의 옷이 어느정도 몸에 붙기 시작했고 만족스러웠다. 재수가 끝날 때 즈음엔 처음보다 2~3kg가 붙었더라.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 정도로도 자존감은 많이 올라갔다. 아직도 옷은 95사이즈를 입었지만 최소한 헐렁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 때가 63kg 정도였고 그걸로도 만족했었다.
대학에 다니기 시작하고 그 때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또 생각이 바뀌더라. 늦은 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술집 거리를 같이 지날 때면, 길거리엔 무서운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나보다 체격이 작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였고 누가 시비를 걸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흉기를 들지 않는한, 내 옆의 사람은 고사하고 내 한 몸조차 지킬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큰 체격에 대한 갈망이 시작됐던 것 같다. 그래서 턱걸이 말고도 헬스를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던 그때 21살의 9월, 회전근개가 찢어졌다.
예전의 글에서도 써두었지만, 결론적으로 그 시점부터 9개월동안 아무런 운동도 하지 못했다. 체격이 커지긴 커녕, 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 몸무게는 60kg까지 빠졌고, 등은 앙상하기 이를데 없었다. 앙상해진 등과 함께,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22살의 5월, 다시 운동을 시작하던 때 찍어둔 사진이 있는데, 다른 동기들한테 보여주면 지금의 나라고는 믿지 못하더라. 그 즈음에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에게 첫 인상을 물어봤을 때도, '아 되게 마른 분이다.' 라고 했으니.
어찌저찌 재활을 마치고 마침 그 시기에 자취를 하게 되면서, 자취방에 홈짐을 차렸다. 홈짐이라 해봤자 치닝디핑에 아령 몇 개, 푸쉬업바 이 정도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부상이 없는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 했고, 그때부터 완전히 본격적으로 영양, 운동 방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취생의 특성상 단백질을 채우기가 힘들어서 프로틴 쉐이크를 마시기 시작했고, 세 끼를 무조건 챙겨 먹었다. 추후에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쓰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어깨 회전근개, 이두근 염증, 손목 TFCC, 건초염, 족저근막염 등 크고 작은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헬스를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21년 5월 1일, 나는 체중 71kg, 체지방 15%에 XL 사이즈 옷을 입는다. 집에서는 예전 옷이 안맞는다고 싫어하시지만, 다칠까봐 운동하는것도 별로 안좋아하시지만, 나는 지금의 몸이 좋다. 더 이상 옷을 고를 때 어깨가 좁아보일까봐 고민하지 않는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사이즈나 데피니션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디가서 운동한다는 말을 하는게 부끄러울 정도도 아니다. 발전하는 지금 이 과정이 그냥 좋다.
마른건 잘못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마른게 싫어서 그걸 벗어나고 싶어 아둥바둥 거렸지만, 애초에 그건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과거의 나와 같은 처지인, 혹은 그보다 더 마른 사람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물론 시간, 돈, 노력이 들지만 절대 바꿀 수 없는게 아니라고.
앞으로의 글들에서는 운동을 하면서 몸으로, 이론적으로 겪었던 이른바 '내가 4년전으로 돌아가면 했을, 혹은 하지 않았을 내용들'을 정리해서 써보려고 한다.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많은 멸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