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말했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별것도 아닌 것에 지나치게 감탄하거나 성을 내는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문장과 처음 대면했을 때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24년의 나는 하루키의 말을 거듭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 일하기 시작한 카페에 한 그룹의 회사원(으로 추정되는)분들이 들어왔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멋지게 가르마를 타고 네이비색 정장에 타이의 커프스 까지 멋졌던 신사 분이었는데, 하필이면 여러 사람 중 그 멋진 신사분의 음료가 주문과는 다른 음료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걸 알아챈 옆 사람이 '여기 음료 잘못나온 것 같은데요' 하는 순간 호다닥 달려가니 따듯한 음료로 나가야 할 것을 차가운 것으로 나간 것이었다. 그 음료의 주문자인 멋진 신사분은 거듭 죄송하다며 음료를 금방 다시 제조해드리겠다는 내 말에 '그럴 수도 있죠 시원한걸로 마시죠 뭐~' 하며 웃어넘겼다. 음료 제조를 몇번 더 말했으나 정말 괜찮은 눈치여서 그만뒀다. 그래도 그냥 만들어드릴 것을.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야 후회한다. 인자하고 여유있는, 회사의 중역일 것만 같은 그 선생님은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그렇게 손님들에게 은혜아닌 은혜를 받는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지고있다.
나의 주관이 확실하다는 건 멋진 일이다.
'어디에서든' 내 주관이 이렇고 그게 맞지 않느냐고 외치며 소리내는사람, 그게 나였다. 나는 오랜시간 건강 회복만을 바라보며 집에 빌붙어 생활하며 금액을 받아 쓰며 안전한 부모님 집 그늘 아래서 지냈다. 집은 경기도 외곽의 외곽으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지않은 이상 별 외출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얻어 타는 용돈이 있었으니 내 맘대로 자유롭게 지냈다. 훗날 돌아보니 그렇게 얻은 자유는 반대로 족쇠로 작용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노동에서 소외되었으며 또 스스로 노동을 소외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 밖에.
'이럴 때 저렇게 행동하면 더 좋을텐데, 잏게 하면 더 좋았을건데..'
맘 속에서 혼자 훈수 두기에 바빴다. 누린 것은 많아 기준은 높았고, 좀 많이 아닌 것 같을 때엔 소리내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혼잣말 혹은 옆에 있는 사람과 작은 소리로. 상대방 면전에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시간이 많진 않았다. 그러니까 옆사람에게 궁시렁 댈 시간은 있으면서 말이다. 배짱도 없는 거겠지. 비꼬는 것을 좋아했다. 참 잘했었다. 그게 취미이자 특기라도 되는 양 옆에 있는 사람에게 떠들어댔다. 옆 사람은 재밌어 하다가도, '그렇게 까지 해야해?' 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러던 내가 수년만에 일 다운 일, 알바 다운 알바를 시작했다. 한달 정도 두 업장에서 일하고있는데, 여지껏 깨트린 컵 2개, 계산 실수 4회, 배송실수 2회(배민 배송 누락과 제조 지연), 주문 메뉴 착오 4회 를 기록했다. 이런 내가 계속 일 할 수 있는 건 비교적 널럴한 기준의 사장, 그리고 느리고 실수 투성이에 굼뜬 알바생을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용인해준 손님들 덕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모르겠지, 같은 상황이었을 때 종업원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나의 모습을.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선의를 딛고 살아가는지 실감한다. 나와 관계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들은 다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절대적 기준에서 최선으로 비춰지건 아니건 말이다. 장황하게 쓰다보니 일 못하는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듯한 글이 탄생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건 나는 매일 더 나아지고 있다. 오래도록 일을 하지 않아 배수구로 다 빠져나간 것 같던 '일의 감각'도 돌아와서 충족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무엇보다, 바쁘게 일하며 오히려 하루의 시간을 더 잘 쓰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헐렁해서 스르륵 흘러내리던 지나치게 큰 바지에 벨트를 메었더니 딱 맞는 바지가 된 것 같달까. 심지어 절대적 활동량이 늘어나자 수면의 질도 급 상승했다.
살아가며 언제나 꺼내들어야 할, 명싱해야 할 태도가 있다면 '두려워 하는 그것에 부딪혀야한다' 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래도록 스스로의 몸 컨디션을 생각하며 노동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근처에 다가갔다가도 약간의 이상 신호가 감지되면 지레 겁먹고 다시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니 지금 이렇게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건, 지금껏 내 스스로 몸에 올인하며 몸의 건강에 목매며 돌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그 때라는 건 누구에게나 다르게 적용될 것이고. 나는 내가 걸어가야 했을 과정을 밟은 거겠지. 조바심 내지 말고 초연하자.
오늘도 다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동요 말고 내가 하고자 한 것들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