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과 소외, 상실
덜컹덜컹, 끼이이익 따위의 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달리거나 멈추는 열차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역 바깥으로 나갔다. 밤부터 오전까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하늘엔 구름이 층층이 뒤섞이고 나뉘어 구름들의 천지창조 같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많은 인파가 지나던 그곳에 오래도록 멈춰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푹푹 찌는 더위와 인파로 들끓는 연옥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천상을 올려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해 여름, 곧 올리게 될 연극 연습을 위해 주에 서너 번은 청량리역 부근에 방문하곤 했다. 그날도 경의선 3번 출구로 터덜터덜 나와 여러 갈래로 뒤섞인 기찻길이 내려다보이고 탁 트였으며 꽃과 나무가 군데군데 심어진 광장으로 향했다. 방향을 틀어 연습실을 향하려던 찰나, 개 짖는 소리에 돌아보니 이미 몇 차례 보아 익숙한 회색 머리의 노인과 원래는 흰색이었을 듯하지만 때가 묻어 회색으로 변해가는 강아지가 있었다. 노인과 강아지를 처음 본 건 몇 주 전이었다. 그 후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도록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곳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노인과 강아지는 내가 목격한 대부분의 순간 함께였다. 햇살 좋은 날, 바깥 광장에 돗자리를 편 노숙인들이 대대적인 막걸리 회동을 하던 날도, 여기저기 흩어져 조용히 사색하는 듯한 날도 노인과 강아지는 함께 구석에 있었다. 대다수의 노숙인들은 철 지난 긴팔 셔츠와 긴 바지를 걷어붙인 채 한 손에 소주 혹은 막걸리를 들고 다니며 물 마시듯 들이키곤 했는데,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 광대 양쪽이 불긋했지만 어김없이 손에는 아직 따지 않은 막걸리 병을 쥐고 있었다. 청량리 경의선 역사 내부와 바깥 광장에서는 노숙인을 꽤나 많이 볼 수 있다. 단 한 명, 강아지와 함께이던 그 노인만은 언제나 외진 구석 자리에 있었는데, 비가 오건, 해가 쨍쨍하건, 낮이건 저녁이건 역사 처마 밑 그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내가 지나던 시간은 대부분 일정했고, 그들의 하루 루틴 중 쉬는 시간이 공교롭게도 내가 지나는 시간과 겹쳤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내가 본 그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 반대 역시 물론 마찬가지. 그는 항상 혼자였지만 강아지만은 예외였다. 노인은 별다른 말도 없이 허공을 주시하며 강아지에게 자신이 먹던 만두나 어묵 같은 걸 조금 떼어 내밀며 뭉개지는 말로 “먹어” “잘했다” “옳지” “덥구나” 하곤 했다. 강아지는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솜방망이 같은 손을 뻗어 노인의 팔을 두드리곤 했다. 노인과 강아지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동떨어진 섬처럼 멀거니 앉아있었다. 노인은 이따금 쓰다듬는 것도 두드리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손짓으로 강아지를 어루만졌고 강아지는 노인의 손길에 의해 눈꺼풀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흡족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이내 노인의 옆에서 고개 세워 ‘당신이 하는 건 무엇이든 다 좋다’는 듯 기쁨이 가득해 윤택이 흐르는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3번 출구가 가까워 오면 강아지와 노인이 거기에 있기를 바라곤 했다. 출구 어귀에 앉아있던 그들, 노인이 입고 있는 다 헤진 체크무늬 셔츠에 진 얼룩처럼 삶의 고됨이 묻어있는 듯한 노인과 노인의 색이 묻어난 듯 나날이 색이 바래가는 회색의 길 강아지를 보는 순간은 퍽 고요해 도심의 혼잡 속에서 잠시나마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는 듯한 그들을 보고 있자면 편안했다. 노인과 강아지는 세상에 속하는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했다. 둘의 세상에는 둘뿐이었다. 같은 종족의 무리도, 사료도, 막걸리도 다 필요 없다는 듯이. 나로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당시 나에겐 함께 있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게 다 좋을, 그런 사람이 간절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둘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긴 할 텐데 말이지.... 노인을 올려다보던 강아지의 눈이 좋았다. 나는 저런 밀도의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일이 있나, 없는 것 같은데. 다소 어깨가 축 처지는 듯한 기분이 됐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 쏟은 애정을 내 삶의 가치와 맞바꾼다면 나는 정말로, 저 강아지만큼도,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했구나, 하는 자조 어린 생각이 스쳤다. 물론 강아지의 삶이라고 우습게 보는 게 아니지만, 내겐 강아지에겐 없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과 각종 도구 그리고 심지어 언어까지 주어지지 않았나! 잘 써먹진 못하지만 상상력은 또 어떻고! 인간은, 나는 특권층이 아닌가. 가장 기능적으로 혜택받은 생물종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앉아있는 게 아님에도 “길을 막고 있으면 어쩌냐!”라며 힐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애꿎은 물가만 보면 일단 조약돌을 던지고 보는 사람처럼 자신이 마땅히 옳다고 생각하는 바와 다르면 일단 시비를 거는 자들이 있을 때, 노인은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지켜보던 강아지는 노인에게 쏘아붙이던 사람을 향해 수만 년 역사의 강아지 나라를 침탈한 범인이라도 만난 듯 온몸과 마음으로 짖어댔고 쏘아붙이던 자들은 곧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그날 청량리에 도착해 하늘을 보니 대낮임에도 우중충한 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고, 강아지는 또 누군가를 향해 짖고 있었다. 두꺼운 담요와 강아지용 케이지를 들고 있는 자들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유기견 센터 직원들이 강아지를 '구조' 하려는 듯했다. 강아지는 그들을 보자마자 짖기 시작하더니 거칠게 으르렁댔고 노인도 “얘는 여기서 지낸다"라며 그들의 접근을 막으려 했으나 그들은 길거리에 주소지를 둔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노인에게 돌아온 대답은 “강아지를 여기서 어쩌려고 키우냐”는 말뿐이었다. '좋은 비는 내려야 할 때를 안다'고 했던가, 하늘은 큐사인도 보내지 않았는데 끔찍하도록 시의적절하게 비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담요에 감싸져 그들의 케이지에 실렸고 길거리의 친구를 뒤로한 채 연행됐다. 극세사 재질의 보들보들한 담요로 덮여 케이지 안에 담긴 강아지는 가시 돋은 선인장에 몸을 부비는 듯 애처롭게 끙끙 거렸고, 멀어져 가는 내내 노인을 향해 울부짖었다. 절규하며, 신음하듯 짖었다. 마치 ‘내게 관심을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니 나에겐 당신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모두 나의 상상일지 모르지만, 그 짖음엔 내장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노인은 강아지가 멀어져 간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이내 제풀에 지친 듯 박스를 깔고 땅에 엎드려 누웠다. 영영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인 듯 오래도록 꼼짝 않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고작 몇 분 사이에 누군가는 세상의 전부를 잃기도 한다는 생각에 입이 마르고 목이 탔다. 노인과 강아지는 오래도록 서로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매 끼니를 해결할 때 무언가 허전하지는 않았을까. 무심코 팔이나 종아리를 주무르다 원래 그곳에 있었을 하얀 털 뭉치를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함께 몸을 뉘인 채 잠에 들던 밤이 그립지는 않았을까, 세상의 전부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이 그립지 않을까.
그 후 청량리 3번 출구의 노인을 볼 수 없었다. 다른 출구로 자리를 옮긴 것일지 보호소에 들어갔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내부에서도 무언가 변화가 일지 않았을까. 매일같이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누군가의 눈빛이 사라진 것으로 그 자신의 존재가 얇아지진 않았을까. 이제 서로를 지켜줄 누군가가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곁을 내어 줄 존재가 없어진다는 건 체온 유지 측면에서도, 심적으로도 상당히 큰 부재가 아니었을까. 공연이 모두 끝난 뒤, 합평을 위해 들린 청량리역 광장은 어느새 가을의 옷을 두르고 있었고, 여느 때처럼 막걸리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3번 출구 앞에는 분주한 행인 외에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노인도 강아지도 그곳을 잃은 것이다. 괜스레 쓸쓸해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길을 걸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잔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다 그 노인 같았다. 그 여름, 노인과 강아지가 잃은 건 무엇이었을까. 내가 잃은 것은 어떤 것이었나. 공연 합평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내 삶만 비평하고 있었다.
기차들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철로를 바꿔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