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을 지우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일까
“세상에, 여기 언제 이렇게 바뀌었어요?”
문득 질문을 건넨 할머님의 눈은 갑작스레 초콜릿 선물을 받아 든 아이처럼 윤기가 흘렀고, 동그랗게 벌어진 입 주변엔 미소의 기운이 묻어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지나던, 썬캡을 쓴 채 뒷짐 지고 지나던, 양산을 쓰고 지나던 … 자신을 동네 주민이라고 했거나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한 말이다. 꽤 많은 주민들이 뜻밖에 마주한 공간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여기가, 얼마나 금싸라기 땅인데 여기가-, 어휴 말도 못 했어요. 쓰레기 창고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유, 그림들도 화사하고 너무 좋네” '저는 여기에서 근무할 뿐'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감사를 표하고 가는 분도 있었다. 그 전에는 얼마나 보기에 안 좋았으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전시장은 경복궁역 어귀에 위치한 1980년대에 지어진 이층 집을 개조한 곳이다. 옛 가옥의 어두운 우드 소재 인테리어를 그대로 유지해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네 집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데, 아직까지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잠금장치로 인해 잘 유지되어 있던 집 내부와 달리 집 밑의 차고는 버려진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모양이다. 화려한 서울 중심부의 한편에 위치한 이곳은 의외로 지독하게 낙후된 집으로 가득했다.
전시장 주위에는 연식이 조금 되어 보이는 아파트 단지 하나와 그곳에 오래 자리를 지켰을 집들, 사람이 살긴 할까 싶은 낡은 건물이 대부분을 이룬다. 언덕 위에 올라 내려다보면 관리가 잘 된 주택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의 집에는 고지서와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각종 폐기물로 뒤덮여 넝마를 둘러쓴 듯한 집이 절반 정도를 이룬다. 전시장에 근무하는 시간 동안 파편 같은 정보를 흘리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조합해보니 이런 까닭이었다.
‘이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곳에 살고 있으며, 낙후된 동네가 하루빨리 재개발에 포함되도록 더욱 낡고 지저분하게 보이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거주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값이 오를 것을 기대해 더욱 낙후되어 보이게 방치하다니. 땅은 살고 있는 사람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만약 저 땅이 내 땅이었다면? 나는 달랐을까? 나는 재산을 증식하려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는 좀처럼 답을 할 수 없었다.
초, 중, 고, 성인 가릴 것 없이 모두의 꿈이 건물주인, 그러니까 부자가 된, 돈을 추앙하게 된 세상에서 누군들 돈을 져버릴 수 있을까.
전쟁통에 북에서 넘어왔던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소작농을 하며 돈이 모이는 대로 땅을 샀다고 한다. 그 땅은 강남에 위치한 땅이었고,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할아버지의 형이었던 큰 할아버지에게 모두 전해진다. 작은 아들이었던 할아버지에겐 한 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아들, 나의 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소아마비를 겪었고 큰 할아버지는 천만 원을 내어 줬다고 한다. 공무원인 할아버지의 월급이 2~3만 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 거금을 병원비로 몽땅 쓴 일은 그 후 우리 집의 전래 동화 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60년대에 큰 할아버지가 내어준 돈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여기에 있을 수나 있는 것일까. 그런 역사를 거쳐 여기에 서있는 내가 감히 돈을 져버릴 수 있을까.
전시장에서 언덕을 조금 걷다 보면 사직터널 위를 가로지르는 작은 길에 접어든다. 산책로 양옆으로는 초록 잎이 가득해 마치 짧은 등산을 하는 기분이 든다. 터널을 지나 옆에 위치한 ‘사직 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들고 내려가는 길에는 버려진 물건이 수북히 쌓여있는 공터가 있다. 왜인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유년 시절의 내가 코 흘리며 뛰어다녔던, 이제는 없는 골목이 떠올랐다.
오랜 단골인 할머니가 수화기 너머로 '응암 3동 삼오삼에 이호'라고 하면 짜장면 하나만 시켜도 군만두까지 뚝딱 가져다주던, 고즈넉한 달이 뜬 저녁이면 찹쌀떡-과 아이스케키-를 부르짖던 행상들의 마지막 외침을 들을 수 있었던 골목, 맞벌이 하며 늦게까지 오지 않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홀로 튼튼영어 테잎을 틀어둔 채 투니버스를 섭렵하던 소년이 살던 그 동네의 좁고 굽이진 골목.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최초의 집이 있던 골목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함께 위층에 살던 할머니는 매 끼니 한 상 가득 밥을 차린 후 나를 부르곤 했다. 상 위엔 먹을게 충분 했음에도 항상 ‘별로 먹을 건 없는데, 얼른 주워 먹어’ 하고는 식탁 옆에 할머니 홀로 내려 앉아 식사를 시작하곤 했다. '할머니, 자리 있는데 왜 내려가요?' 물으면 '여기가 편혀'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어깨너머로 김치 만드는 과정과 식혜 만드는 과정을, 고스톱을 배웠고, 할아버지는 가끔 나를 산에 데려갔으며 바둑 두는 법을 알려줬다. 물론 배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이다. 어째선지 나는 그 집을 ‘할머니 집’이라고만 줄기차게 불러왔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할아버지는 거의 대부분 시간 바둑을 두러 기원에, 산에, 구청에 갔지만 할머니는 거의 언제나 집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시절 기억엔 유독 할머니와 엄마의 기억만 가득하다. 남자 어른들의 기억은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 것 처럼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가정을 위해 헌신 했을 그들에겐 송구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들은 없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할머니로부터 비롯된 모든 가족들의 시절이 담겨있는 3층 다세대 주택은 2017년에 무너졌다. 그 자리엔 ‘디우아르떼빌’ 이라는 큼지막한 11층 건물이 어색한 포즈를 취하며 서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근처의 신축 빌라 한 호수를 얻어 이사했다. ‘응암동 삼오삼에 이호’집에 살 때 생애 첫 친구 재성이가 살던 바로 뒷집은 우리 집 건물과 함께 묶여 하나의 빌딩으로 치환됐다. 이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알 길 없는 재성이가, 영문이가, 본영이와 함께 콧물 흘리며 뛰어다녔던 골목은 새로 들어찬 거대한 건물에 삼켜지거나 고양이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게 좁아졌다.
겨울이면 옥상에서 눈삽으로 눈을 뿌리며 눈싸움을 하던, 해가 거듭될 수록 높이가 낮아지던 대문 그리고 집과 골목은 영영 사라진 것이다. 함께한 이들의 기억 저편에만 어렴풋이 존재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골목에는 누군가의 시절이 깃들어있다. 짜여진 규격대로 만들어진 획일화 된 신도시 식 재개발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시절을 아파트라는 값으로 치환했을까. 성장 만능주의의 끝이 보이는 오늘날, 공간을 바꾸는 방식은 갈아엎고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보존하고, 덧대고 강화하는 쪽으로 변해야 하지 않을까. 하재영 작가는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라고 그의 저서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말한다.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간과 시절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공간은 시절을 담는데, 한 시절이 지워진 공백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무엇으로든 채운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